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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여행기(1)-만세절벽-새섬-일본군최후사령부-한국인추념평화탑-리조트나의 여행기 2007. 11. 10. 19:42
사이판 여행기(1)-만세절벽-새섬-일본군최후사령부-한국인추념평화탑-리조트
2007년 11월 2일 오후 20시 20분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사이판을 여행했다.
신혼부부들이 많이 간다는 사이판이다. 신혼부부는 아닐지라도 태평양상의 섬이니 가보고 싶기도 했다.
사이판 섬(Saipan)은 전체 115.39 km2의 면적과 함께 서쪽의 태평양 (15°10’51”N, 145°45’21”E)에 있는 마리아나 군도에 속하는 15개의 열대 섬의 일련인, 북마리아나 제도 미국 연방의 가장 큰 섬이자 수도이다. 2000년의 인구는 62,392명이었다.
북위 15.25°와 동경 145.75°에 위치하며, 괌의 북쪽으로부터 대략 200 km 떨어진, 사이판은 20 km의 길이와 9 km의 폭을 가지고 있다. 그곳은 인기 있는 태평양 연안의 관광객 행선지이다. 일본령이었을 때의 이름은 사이한도 (彩帆島, さいはんど)였다.
섬의 서쪽은 모래 해변과 큰 규모의 석호를 창출하는 앞바다에 산호초가 자리잡고 있다. 동쪽 해안은 주로 울퉁불퉁한 바위투성이의 절벽과 암초로 구성되어있다. 그곳의 가장 높은 지점은 474 m 높이의 타포차우산이라 불리는 산을 덮는 석회암이다. 많은 사람들은 타포차우산을 활동이 멈춘 화산이라 여기지만, 사실 석회암 층이다. 타포차우산의 북쪽에 만세 절벽은 언덕 산등성이다. 북쪽 대략 3.2 km에 위치한, 아츄가오산은 에오세 중심지가 현재 정상의 북쪽에서 멀지 않은 계층화된 혼성의 원추화산 (圓錐火山)의 잔여로 해석된다.
북마리아나 제도의 현재 통치자는 주안 바바우타의 후계자인 베니그노 피셜이다. 섬은 또한 2001년으로서 전체 인구의 60%를 중국, 방글라데시, 필리핀, 태국, 베트남, 캄포디아 출신의 계약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다른 언어와 인종 그룹을 가지고 있다. 추가적으로, 섬 인구의 큰 비율은 일본, 중국, 한국 출신의 1세대 이민자들과 다른 마이크로네시아 제도 출신의 이민자들을 포함한다.사이판과 이웃하는 괌, 로타/루타, 티니언을 따라서 북쪽으로의 더 작은 크기의 소형의 섬들까지 기원전 2000년경에 최초의 거주가 이루어졌다.
스페인인이 차모르족을 만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스페인은 결국 사이판을 마리아나 제도에 대한 청구의 일부로서 합병했다. 1815년 경, 사타왈 출신의 많은 캐롤라이니언 족이 차모르족이 괌에 갇힌 시기 동안 사이판에 정착을 했으며, 차모르 종족의 땅과 권리의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
1899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독일이 사이판을 지배했으며, 일본 제국이 섬을 인수했을 때, 1922년 부터 국제 연맹 명령아래 사이판을 다스리고 있었다. 일본인은 낚시와 설탕 산업 둘다를 개발했으며,
1930년대에 사이판을 심하게 주둔지화 시켰으며, 1941년까지 거의 30,000 명의 군인을 두게 된다.
1944년
6월 15일
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해병대가 섬의 남쪽 해변에 상륙했으며 일본인으로부터 그곳을 보호하기 위해 사이판 전투로 3주를 소비했다. 또한 미국 해군의 해군건설대가 건설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위해 상륙했다. 그 전투 동안 수천의 시민들이 죽었으며, 많은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위해 뛰어 오름으로서 자살을 한다. 그 전투는 존 우의 2002년 영화 윈드토커로 극화되었다.북마리아나 제도가 1986년 11월에 미국에 가입한다. 협상 동안, 북마리아나 제도와 미국은 북마리아나 제도가 확실한 연방법으로부터 면제받기로 동의하면서, 어떤 관련된 산업 관계와 이민을 포함했다. 한 가지 결과는 호텔과 관광의 증가였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옷 공장들 또한 문을 열었다;의복 제작은 섬의 주요한 경제적인 힘이 되었으며, 그들의 제품에 "made in the U.S.A"의 꼬리표를 붙임과 동시에 수천의 외국인 계약직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낮은 가격의 의복들이 미국 수입 관세로부터 면제되는것과 함께 미국 시장을 공급하는것을 지속했다. 이 공장들에서 고용자들이 경험한 작업 조건과 대우는 논쟁과 비평의 주제가 되었다.
20시 20분발 사이판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집사람
사이판 타포차우산이 보이고 정박중인 상선이 보인다. 사이판 국제공항에 접근중이다.
날씨가 화창하다.월드리조트에 여장을 풀고 잠시 밖을 내다보니 제일높은 타포차우산이 지척이며 에머럴드 보석같은 쪽빛의 바다도 보인다.
멋진 휴양시설을 갖춘 리조트다. 이국의 정취가 물씬 ............
아침을 먹고 리조트 주변을
첫일정으로 버스를 타고 찾아간 곳은 만세절벽이다. 태평양 바다가 다 그렇지만 가슴이 뻥 ........
그 연유와 사정이 어떠해도 나는 관광이다. 누굴위한 충혼비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참고:만세절벽(Banzai Cliff)-[짙푸른 코발트 빛 바다와 확트인 태평양 그리고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와 물보라 등 겉으로 보기엔 너무도 아름답고 인상적인 곳으로 사이판을 대표하는 관광코스다.
그러나 이곳은 비참하고 처절한 전쟁 유적지이기도 한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택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1944년 7월 7일 일본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음을 알게되자 일본군은 천황의 옥쇄명령에 따라 7월 8일 수천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정확히 일본 영토를 향해있는 이 절벽에서 '반자이(Banzai; 천황만세)'를 외치며 푸른 바다속으로 투신 자살을 했다.
그래서 절벽이름도 만세절벽이란 이름이 붙었다.이곳의 바다색은 수시로 바뀌며,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바다와 암석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는 절경중의 절경으로 언덕위에는 위령과 평화를 위한 충혼비가 1970년에 세워졌으며 빨갛고 노란 해변 꽃이 피어있다. 또한 영화 빠삐용에서 유배생활로 늙어버린 주인공이 바다로 탈출하는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http://travel.daum.net/place/place.daum?placeid=HTCC21CSPN0002
집사람도 기분이 up!
이 바닷가 절벽에는 온통 이 파란 식물이 덮혀 있는데 노란꽃이 피는 씀바귀 종류로 보이는데 글쎄
만세절벽에서 육지쪽을 바라보면 여기도 절벽
수많은 일본군이 저 절벽에서도 목숨을 던지고
바닷가 벼랑에서도 수많은 일본군이 목숨을 던지고. 마피산 정상에서도 수많은 일본군이 목숨을 던지고.
그들이 자초한 것이지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 때문에
나라에 충성을 다했지만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겠는가?
참고 : 자살절벽(Suicide Cliff)[일본인들의 한맺힌 설움이 있는 곳, 자살절벽(Suicide Cliff)
해발 249m 높이의 마피산의 서쪽 절벽으로 1944년 미해병대의 상륙작전을 개시하자 수천명의 일본병사들과 가족들이 항복을 거부하며 이곳 절벽 꼭대기에서 어떤 가족은 나이 순서대로 아이 먼저 세운 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뒤로 돌아선 채 행진하여 절벽아래 정글숲으로 투신했고, 또 어떤 가족들은 수류탄을 떠뜨려 온가족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있던 장소이기에 자살절벽(Suicide Cliff)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 뛰어내린 일반인들중에서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너무 많은 사람이 뛰어내려 어떤 경우에는 살아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마피산 서쪽 절벽, 자살절벽(Suicide Cliff)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새섬이다.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 외에 새가 많이 산다는 것. 그 이상은 아닌 듯하다.
많은 구멍이 보인다. 새가 살고있는 구멍이란다. 석회암이라 경도가 낮아 새가 집을 짓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듯하다.
물론 그 날 어느 새도 그곳에서 확인은 할 수 없었다. 새들이 많이 살기도 하지만 섬 주변의 파도가 마치 새의 날개짓과 같아 새섬이라고 불린
다고도
.
새섬 근처에도 예쁜 꽃들은 많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일본군 최후사령부다. 말 그대로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다 권력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의 헛된 욕망으로 일시는 자부와 자긍을 누렸지만 결국은 패망을
이곳에서 그들은 최후의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망가진 그들의 대포가 그들의 최후를 말해주고 있다.
참고:일본군최후사령부(Last Command Post)[마피산의 절벽에 있는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콘크리트로 굳혀 만든 사령부로 1944년 미군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요새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최후 사령부(Last Command Post)가 있었던 자리다.
밖에서는 전혀 요새와 같은 흔적이 없는 곳이기에 일본군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최후사령부의 측면에는 직경 2m 정도의 큰 구멍이 있는데 이는 전투 당시 미국의 직격포탄에 맞아 생긴 것으로 처절하고 비참한 전쟁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부 태평양전쟁 희생자의 비가 있고 앞 광장에는 대포와 전차의 잔해가 남아 있다.]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한국평화기념탑이다. 사이판에 왜 한국인이?
무엇을 기념한다는 말인지? 먼 이국땅 이 곳에 강제로 끌려와서 목숨을 빼앗긴 젊은 남녀들, 우리 선조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운 것도 아니고. 강제로 끌려와서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분들이 아닌가? 차라리 위령비가, 위령탑이
암튼 그 때 이곳에 강제로 끌려와서 희생양이 되었던 그 분들께 머리숙여 영혼을 위로합니다. 정말 억울해!
참고:[2차 세계대전 당시, 사이판에는 강제연행 등으로 수천명의 한국인 노동자·군속이 있어, 그 대부분이 전투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전해진
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문도 모르고 머나먼 이국땅인 사이판까지 끌려온 한인 징용자들은 국적의 정체성까지 잃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했
다.]
첫 일정을 마치고 도심(도심이라할 것도 없지만)으로 돌아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때 그곳도 선거 일정이 여기저기에 자신을 소개하는 안내 선거판이 있었다. 유세 장면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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