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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따현여행기-4-가꾸노다테-다자와호수나의 여행기 2011. 1. 25. 14:49
아끼따현여행기-4-가꾸노다테-다자와호수
아침일찍 들꽃을 많이 본 후라 기분이 훌훌
오늘은 또 다른 관광지가 있으니 기대가 크다.
요코테에서 버스로 요코테 학생과 우리 학생들이 한 버스에 타고 가꾸노다테로 향했다. 13번 도로다. 왕복 2차선이라 큰 길이 아니었다.큰 산이 없는 평야다.
먼저 들른 곳은 가마꾸랜드다. 특별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 들른 것은 아니다. 관광차원이니 이런 곳이 있다는 정도의 홍보차원일 것이다.
가마꾸촌이라는 휴게소?에 들렀다. 우리나라의 휴게소와는 좀 다르다. 화장실과 상품을 파는 상점이 들어있다.요코테의 특산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큰 매장이었다. .
秋田ふるさと村 Kamakuland
1994年4月
に開村した。近代美術館を除き管理運営は、指定管理者制度
によって秋田県の第三セクター
「株式会社秋田ふるさと村」が行っている[3]。マスコットキャラクター
は秋田犬
の「ノブくん
」。秋田県の魅力を紹介するテーマパークで、名産品・特産物の展示・販売、工芸品の制作実演の見学や、実際に体験できる工房もある。敷地内には、秋田県立近代美術館
、プラネタリウム
、トリックアート
などのアミューズメントのほか郷土料理
も楽しめる。施設内のドーム劇場では、年末年始の映画上映など、さまざまなイベントが行われる。1999年7月
(秋田では初)、2000年
7月にはモーニング娘。
のコンサートを開催する。2009年9月
には、『第4回B-1グランプリ
in YOKOTE』の2会場のうちの1つになった(もう1会場は横手市中心部)。開村後、しばらくは有料施設の入館料のほかに入村料(共通券:1,600円ほか)を徴収していたが、1999年
に入村無料となった。
주소:秋田県横手市赤坂字富ケ沢62-46
Thunbergia alata
주변의 예쁜 꽃만 보았다. 다시 13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한 시간 20분을 더달려 가꾸노다테에 도착했다.
주차장 옆에는 벚나무 둑방길이 있었고 그 옆에는 개울이.......오랜 옛날부터 이곳에는 벚나무 둑방이. 봄에는 아주 장괸일 듯.
주차장 관리사무소에서 벚나무를 보호하자는 안내판을 세웠다.
고목이라 관심 집중
무사촌으로 들어섰다.
얼마남지 않은 선거에 출마한 입후자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도 보였다.
벚나무 껍지로 공예품을 만드는 전통 공예품(가바자이쿠) 전승관도 있었다.
가바 자이쿠(경제 산업 대신이 인정한 전통적 공예품)
벚나무의 껍질을 사용하여 만든, 수, 공예품은 일본에서 유일한 기술이다.텐메이 연간(1781~89년)에, 아키타현 북부에 위치한 산간지대에 전승되여 온것인데, 가쿠노다테의 무사인 후지무라 히코로쿠가 이 기술을 배워서 무사들한테 보급한것으로 가쿠노다테 "가바자이쿠"의 전통이 시작되였다고 한다.역사가 오랜 이 마을에서 전통적인 기술은 더 발전되여, "가바자이쿠"는 쇼와 51년에 통산성으로부터 "전통적 공예품"으로 인정받았다. 일상 생활에서 쓰기가 편리한 이 제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가바자이쿠"가 계속 진흥과 발전을 기대하여 "가바자이쿠 전통 계승관"을 건설하였다."가바자이쿠 전통 계승관"에는 "가바자이쿠"의 재료, 제작 과정등이 전시되여 있다.
"가바 자이쿠"의 종류
<통 모양으로 된것>
좋은 재료를 사용한것인데, 재료인 목재의 안을 파낸 다음, 통 모양으로 만들고, 그 우에 뚜껑을 만들어 부쳐놓은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옛날에는 담배통, 도장 넣는 통이였는데, 지금은 차를 넣는 차 통이다.
<곽 형태로 된것 >
주로 목판을 재료로 만든 곽 모양의 제품이다. 대표적인 제품은 문구 곽, 먹 곽, 테이블이나 차 단스 등이 있다. 이 제품들은 모두 일상 생활에 필요한 제품이다. 이 제품들은 고급 기술로 만들어져 있다.
<타타미 형태로 된것>
"타타미 형태"의 이미는 사꾸라 꽃나무의 껍질을 얇게 벗겨서, 그 껍질을 몇센치쯤 되게끔 부치는 고급 기술인데, 옛날에는 이 기술로 통이랑, 도장 넣는 통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키모노의 오비, 브로치, 타이 핀, 팬던트등의 장신구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고 있다.http://www.city.semboku.akita.jp/kr/sightseeing/bussan/02_12.html
인솔담당 교무부장님이 단속을 철저히. 무사촌 관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도 있고가쿠노다테는 에도시대
의 무사 마을이다. 이곳은 1620년 이 지역을 통치했던 아시나 요시카츠가 건립한 성을 중심으로 번성한 도시로 예스런 거리를 따라 최고 무사, 중급 모수, 하급 무사의 저택들이 위치하고 있다. 또 많은 옛 건물들은 기념품점이나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도호쿠
지방의 '리틀 교토'라 불리는 곳이다. 200년 이상 된 무사들의 저택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수백 년 된 수양벚나무가 늘어선 350m의 대로를 따라 수십여 채의 무사 저택들을 방문할 수 있다.
이시구로 저택(石黑家)은 이곳에서 가장 격이 높은 무사 저택이다. 이시구로 저택에는 정갈하게 조성된 작은 정원이 있고, 다다미가 깔린 손님 접견실과 차를 끓여 마시는 방, 주인의 방 등을 볼 수 있다. 200년 전의 유카타도 볼 수 있다.
이시구로 저택 뒤쪽으로는 1920년대에 증축한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는 무사들의 칼과 갑옷, 투구, 각종 장신구와 생활용품이 진열되어 있다. 일본 최초의 인체 해부도 사본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대로를 거닐면 오오야나기 저택(유료), 학문을 장려했던 무가 저택으로 알려진 마쓰모토 저택(무료), 중급 무사 가옥인 이와하시 저택(무료), 가와라다 저택(무료), 오다노 저택(무료) 등 옛 일본 무사들의 저택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무사 가옥을 개조한 기념품점과 레스토랑이 있고, 무사 가옥 형태로 외관을 꾸민 호텔도 있다.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를 만나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1530~1578)은 일본에서 내란이 계속되던 일명 '전국시대'에 최고 사무라이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천재적인 전술로 생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군신(軍神)으로 불리기도 했다. 야마가타 현 요네자와
(米澤) 시의 요네자와 성(城)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기리는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정에 밀려 그냥 지나쳐온 아쉬운 관광지다.
청유가란다. 무사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 생활용구가 잘 정리되어있다. 풍족한 생활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긍지 만큼은
확실한 듯. 또 이곳은 무사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무사들이 입었던 갑옷이 인상적이다.
靑柳家(야오아키케)靑柳家만 해도 향토관, 무기관, 하이칼라관, 골동품관,생활주택, 기념품매장 등 20동여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
그러나 본 것은 일부다.
여러채의 무사집들 중 겨우 아오이아키케 한집만 보고 나왔다. 유난히 들꽃들이 많이 있었다.
야오아키케 이 집에서만도 이름모를 들꽃들로 가득차 있었다.
현재 무사촌에는 정원이 잘 정리되어있고 각 종 꽃들이 많이 식재되어있다. 특히 산에 많았던 야생화들이 들로 나왔다.
남천
마을을 나와 주차장을 지나 둑방에 오르면 수백년 묵은 벚나무가 죽 장관을 ........
봄 벚꽃이 보고 싶다.히노키 나이 츠츠미노 소메이요시노
히노키 나이 츠츠미노의 벚꽃은 쇼와 9년(1934년)에 황태자의(지금의 헤세이 천황) 탄생을 기념하여 심은것이다. 2 km쯤 되는 거리에 심은 나무는 봄에 꽃이 만달 할때면, 꽃 터널이 되여 이곳을 산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그리고 꽃이 져셔 땅에 떨어질때의 꽃보라와, 강에 비치는 벚꽃은 매우 아름답다. 이곳의 벚나무는 심은지 오래되여 병이 든 나무들도 있기에, 시 정부의 문화재산과가 중심으로 되어 관리, 보호하고 있다. 이 곳의 벚꽃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헤세이 2년에는 부케야시키거리등 100개곳과 함께 관광 명소로 인정받았다
http://www.city.semboku.akita.jp/index.php멋진 벚꽃길을 상상하며 다자와 호수로 향했다. 길가의 울창한 숲이 부러웠다.
야 다자와 호수다. 얼마 멀지 않은 아오모리현의 도와다 호수를 본 일이 있지만 그 호수가 남성이라면 이 호수는 여성스럽다.
다자와 호(일본어: 田沢湖 다자와코)
다자와 호(일본어:
田沢湖
다자와코)는 아키타 현
센보쿠 시
에 있는 호수
이다. 일본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며 다자와코다키가에리 현립 자연공원
으로 지정되었다.아키타 현의 중동부에 위치한 호수로 최대 수심은 423.4m, 세계에서는 17번째로 깊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는 바이칼 호
이다.호면의 표고는 249m로 이 때문에 호수 밑바닥은 해면하 174.4m가 된다. 이러한 깊이 탓에 겨울에도 호수는 얼지 않는다. 호수의 색은 비취
색에서 감색
빛깔을 내고 있다.일찍이 화산성 무기물이 다량 함유된 수질과 유입하천 수가 적기 때문에 1931년
조사에서 31m에 이르는 투명도
를 자랑했다. 그러나, 1940년
오보나이 수력 발전소
건설과 농업진흥을 위해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던 다마가와 강
을 끌어 들였고, 이는 pH
1.1의 강산성의 수질을 가진 강이었기 때문에 다자와 호는 급속히 산성화되어 고유종인 구니마스
를 비롯해 많은 어류가 폐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다자와 호 부근에 히메 관음상이 세워졌다.이에 1972년
석회석
을 이용한 산성수 중화대책을 세우기 시작해 1991년
근본적 해결을 위해 다마가와 강 산성수 중화처리시설이 가동했고, 호수 표층부가 중성에 가까울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2000년
조사결과 심도 200m에서 pH 5.14 ~ 5.58, 400m에서 pH 4.91로 아직 호수 전체가 완전히 회복되자면 멀었다.다자와 호는 원형의 깊은 호수지만, 생성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판명이 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호수의 생성원인에는 3종류가 있다.- 칼데라 호 : 도와다 호처럼 거대한 분화에 의한 칼데라에 생긴 호수.
- 크레이터 : 배링거 운석구처럼 거대한 운석과의 충돌로 생성된 곳에 생긴 호수
- 구조호 : 스와 호처럼 단층운동에 의해 형성된 땅에 생긴 호수.
http://ko.wikipedia.org/wiki/%EB%8B%A4%EC%9E%90%EC%99%80_%ED%98%B8에서다자와호수를 검색하던 중
.................전략...한국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자와호’를 검색하면 “이 호수의 생성원인은 아직까지 수수께끼에 빠져있다”고 적고 있다. 일본의 정보를 그대로 베껴 놓은 이 문구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왜냐면 이 호수는 일본에 끌려온 한국 징용병들이 파 놓은 인공호수이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지역민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서 일본으로 징병 온 사람들 중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곳이다.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이렇게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호수를 만드는 과정에 수많은 사고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치명적인 유해물질이 분출돼 인명피해는 더욱 컸다고 한다. 일본에서 가장 깊은 수심을 지닌 이 호수는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더욱 유명해졌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이 호수 지질에서 용해되어 나오는 그 물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이곳의 절경을 촬영한 사진들이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이 올려 있는데 그 중에 “젊음과 미를 찾아 용이 됐다”는 다츠코히메 상을 촬영한 것은 빠지지 않고 올라와 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비를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으니 이상하다.
필자가 이곳을 다녀온 지가 이미 십년이 넘었으니 그 사이에 추모비가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추모비 앞에 꽃다발을 바치며 사진을 찍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사진을 찾을 수가 없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이라 파일도 없으니 그저 기억속의 사진을 더듬을 뿐이다.조선 징용병들의 사연을 소상히 얘기해 주던 일본인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전쟁을 일으키며 그토록 잔혹했던 일본사람들은 누구이며, 자신들의 잘못을 이토록 진솔하게 고백하며 눈물 흘리는 이 사람은 또 누구인지 일본 사람들의 양면성에 가슴이 얼얼해졌다. 후략..........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10523_0008282646&cID=10701&pID=10700
아 이곳도 즐기기만 할 곳이 아니구나. 해설자나 그 누구도 이런 말은 해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공호수라는 말에는 얼른 이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오보나이 발전소를 건설하기위해 우리 선조들을 징용했다. 그들은 이역만리 이 곳에서 악조건에서 일을 시키며 희생을 강요했다.깊은 생각에............
1930년대 후반 들어 일제는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다. 군수물자 생산에 전기는 필수다. 도처에서 발전소 건설 공사
가 시작됐다. 다자와호 주변은 수력 발전이 채택됐다. 상류 강줄기를 호수로 연결한 뒤 호수에서 다시 하류로 물을 내보내 낙차를 이용한다는 아이디어였다. 강과 호수를 잇는 도수로 공사에 조선인 약 2000명이 동원
됐다. 공사 기간은 1938년 2월부터 1940년 1월까지. 이렇게 만든 ‘오보나이 발전소’는 현재까지 가동 중이다.
하는 일은 조선인에게 돌아갔다. 많은 조선인이 공사 중 숨졌다고 한다. 추위와 굶주림도 삶을 앗아갔다.
여러 기록과 현지 일본인 증언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약 8.5㎞인 도수로는 주로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다. 노무자들은 곡괭이와 삽으로 흙을 파냈다. 자재를 나를 때도 마차나 뗏목 등 원시적 수단을 썼다. 일제는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다. 암벽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
다쓰코상에서 호숫가를 따라 약 6㎞ 떨어진 곳에 ‘히메관음상(姬觀音像)’이 서 있다. 공사로 숨진 물고기를 위로한다는 글이 관음상 앞에 적혀 있다. 산성인 강물이 호수로 유입되자 토종 물고기가 괴사했던 것이다. 관음상은 1939년 11월 건립됐다. 그런데 1990년, 도수로 공사에서 숨진 희생자를 위로하는 게 관음상 건립의 더 큰 목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인근 사찰 덴타쿠지(田澤寺)에서 ‘히메관음상 건립 취의서(趣意書)’가 발견된 것이다. 다자와호 주변 마을 사람들은 1991년 9월 22일 히메관음상 앞에서 처음으로 위령제를 열었다. 조선인 희생자를 위로하는 행사였다. 위령제는 그 뒤 해마다 치러진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연구가들에게 현지 강제동원 현장을 소개
해 온 차타니 주로쿠(69) 전 민족예술연구소 소장은 “이곳이 양국 우호·친선의 상징적 장소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다자와호에서 아키타 내륙선 열차를 약 1시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 뒤 다시 자동차로 40여분을 가면 옛 하나오카 광산의 흔적이 나온다. 비철금속 분야 대기업
인 도와홀딩스㈜의 전신 ‘후지타구미
(藤田組)’가 소유했던 곳이다.
갱도 입구는 유별나게도 약 40m 높이 야산 위에 있다. 산을 종단으로 뚫는, 이른바 수직갱이다. 다른 광산은 오래 전 폐광됐고 수직갱만 남았다. 옛 조선인 숙소 터에는 눈이 1m나 쌓여 있었다. 일본 후생성 명부 등에 따르면 하나오카 광산으로 조선인 2700명 이상이 강제 동원됐다. 일부 생존자는 약 4000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야산 정상 수직갱에서 조선인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광석을 캤다. 배고픔과 학대는 물론 중력에 맞서야 하는 고통이 더해졌다. 1944년 5월 29일 하나오카 광산 나나쓰 다테 갱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갱이 붕괴돼 지하수가 쏟아져 나왔다. 수몰된 갱 안에 있던 조선인 11명과 일본인 11명이 숨졌다. 이른바 ‘나나쓰 다테’ 사건. 희생자 22명은 아직도 광산 근처에 묻혀 있다. 종전(終戰) 후 사고 현장이 노천 채굴터로 개발되면서 유골 발굴은 불가능해졌다.
현장에 세워졌던 추모비는 노천 채굴터 개발 당시 근처 사찰 신쇼지(信正寺)로 옮겨졌다. 추모비 뒷면에는 숨진 조선인 이름이 창씨(創氏)로 적혀 있다. ‘山田魯元(朴魯元)’ ‘江川龍伊(韓龍伊)’ ‘星山段載(全段載)’ 식이다. 죽어서도 식민지 국민이다. 11명 가운데 3명(崔泰植 林炳山 吳重甲)만 우리 이름이다. 2명은 아직 이름조차 찾지 못했다.
신쇼지에서 자동차로 동쪽 방향 20여분 거리
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광산이 있다. 도와홀딩스 고사카 광산이다. 광산이 한눈에 보이는 뒷산에 올라서자 화학약품 냄새
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10여분 동안 뒷산에 서 있는데 머리
가 아플 지경이었다. 냄새는 광석이 금속으로 제련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현지인들은 1940년대 악취가 더 심했다고 진술했다. “이곳은 메이지유신(1868년) 때부터 100년 동안 민둥산이었습니다. 유해물질을 배출하기 위해 굴뚝을 만들었는데 유해물질이 담긴 연기가 퍼져나가 나무
가 다 죽었죠. 지금 나무가 많은 것은 1970년대 이후 녹화사업 때문입니다.”
지난달 11일 기자와 만난 고사카 광산 징용자 김경용(83·대구 매호동)씨는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열일곱 살 때 끌려가 1년 남짓 노역에 종사했다. 김씨는 늘 배가 고팠다고 했다. 광산 측이 목욕물을 데워줘도 탈진이 두려워 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동료 징용자는 스물다섯 살 안팎의 형들이었다. “일본말 못 알아듣는다고 두들겨맞기도 했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더 많이 때렸습니다. 이유를 몰랐는데 어느 날 일본인 화차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가네모토(김씨의 일본 성), 너는 좀 있으면 군대 간다. 군인 한 사람 양성하려면 20년 걸려. 다치면 안돼’라고.”
김씨는 이 말에서 일본이 온통 전쟁에 미쳐있었음을 실감했다. “참 무서운 얘기 아닙니까.”
인천발 아키타행 비행기는 요즘도 만석이다. 관광객 가운데 선조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과 차별의 현장은 드라마의 낭만을 추억하는 장소가 됐다. 이건 다만 세월이 가져다준 역설일 뿐일까.센보쿠·가즈노(아키타현), 대구
= 특별기획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599749&cp=du다자와호수의 아름다움에만 취할 수 없는 그런 곳이구나 . 적어도 이곳을 가는 관광객중 한국사람이면 알아야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광회사라면 일정중 히메관음상을 보고 그 징용에 의해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희생되었던 곳임을 안내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과 요코테세료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지어 담소를 한다.주변에는 가게라고 몇 개 안된다.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명지와는 달리 장사꾼이 적다.이곳에도 들꽃이 많다.
다자와호수를 떠나 이곳에서 요코테세료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길가에는 이런 공동묘지가 있었다.점심먹었던 식당 화단에도 이렇게 들꽃이 루트인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요코테세료학원의 초청으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내일은 떠나는 날이니. 이별주 한 잔 '나의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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