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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박 겉핥기 유럽 일부 여행-그 삼(파리-루브루 박물관)
    나의 여행기 2009. 11. 27. 13:06

    제3일

     

     

     

     

     

     

     

     

     

    우리가 묵었던 키리아드 호텔은 변두리에 있었으므로 시간이 좀 걸린다고

    사실 주변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

    호텔앞에는 꽃 핀 화분 하나가 있었다. 프랑스 하면 대단한 문화국민 그래서 많은 꽃도 함께할 줄 알았다. 그래서 호텔에도

    꽃이 아기자기하게 많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다.

     

    호텔 직원이라야 몇 되지도 않았지만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관심이 없다. 그들의 호텔에 묵은 사람인데도 .

    그들이야 어떻든 열심히 보고 배워가는 것이 그래서 마음을 살찌우는 것이.

     

    아침식사후 수신기와 카메라를 챙겨들고 9시쯤 어제 그 버스로 출발했다.

     

    루불 박물관을 관람한다는데 기대가 컸다.

    차창으로 보이는 저것은

    집담도 아니고

     

    성벽도 아니고

    다리도 아닌 것 같고

    건물의 잔해도 아닌 것 같고

    높이는 꽤 되는데


     

     

        

     

     

    변두리라 그런지 고풍스런 집도 별로 없고

    아파트 같은 건물만 보인다.

     

    어!

    반갑다. 광고가 어떤 건물 담에 있는데

     

     

        

     

     

    까만 글자는 잘 못보고 빨간 글자만 기아 광고 인줄 알았다. 하기야 영국에서도 광고는 보았다. 그저 우리것만 보면 즐겁고 어깨

    가 으쓱 나만 그런 것인가?

    [루프트한자] 기내식에서 비빔밥, 김치, 볶음고추장을 보면서

    [대영박물관]한국관을 둘러보면서

     

    [런던] 관광버스새겨진 대한민국 글자를 보면서

    [호텔] 텔레베젼 상표를 보면서

     

     

        

     

         

     

     

     

     

     

     

        

     

     

    중심지에 들어왔는가보다. 건물이 고풍스럽고 창틀마다 조각이 다르다.

    현지 안내인의 말을 들어보면 건물 벽면은 마음대로 고칠 수 없다고.

     

     

     

      

     

      

     

     

     

     

     

    루불박물관에 도착했다.꽤 넓은 광장이 있다. 카메라 삼각대는 휴대할 수 없다고 해서 차에 두고 내렸다.

    수신기는 꼭 휴대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반복한다.

    앞 뒤 좌 우는 고풍스런 건물들이고 보수공사나 증축공사로 어수선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내리자마자 찍기에 전념했다.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나 누군가 그랬다.

    화면으로 책으로 그림으로만 보았던 루불박물관이다.

    역사에 대해서 현지안내인의 설명이 있었으나 기억이 별로 없다.

    광장과 루불박물관 사이에는 넓지는 않지만 왕복 2차선 도로다. 신호등이 있는횡단보도다. 위험하다. 편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바꿀 수는 없을까?

    출입구 건물 위로 보니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진 ...........

     

     

     

     

      

     

     

    1 과 2 는 정확한 대칭인줄 알았지만 이렇게 다르고

     

     

      

     

     

    .

    4 와 5 도 완벽한 대칭인줄 알았지만 이렇게 다르다

     

     

     

    돌로된 이 부분도 세밀하다. 화려하다. 일찍부터 돌을 다루어서 그런지 ......석공이 바로 예술가가 아닌가

     

     

     

    지붕을 보아도 오밀 조밀 세밀한 조각을 했고

     

     

     

    벽면 창틀 등 세밀하다.

     

     

     

    [박물관 입구]

     

     

      

     


     

    한번 쳐다보고 그냥 넘겨버렸는데 세밀하게 보아야 하겠다. 시간이 없다. 시간과 돈이 부족해서 ....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자주 보러 다녀야 하겠다. 건물 양쪽에 조각된 작품들도 각각이다. 같은 줄 알았는데. 놀랍다.

    대영박물관에서도 그랬는데 하도 사람이 많아서 밀려들어간다. 철저한 검사도 한다.

    입구로 들어가니 반 지하형태의 유리 지붕으로 된 넓은 공간이 있다. 현지 안내인이 열심히 해설하고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당부

    한다. 5미터 이상은 안된다나. 하긴 작품보랴 해설 들으랴 잘못하면 일행을 잃을까 걱정되었다.

    처음부터 박물관이 아니고 현재의 이 건물도 처음부터가 아니고 보수와 증축을 오랜동안 해온 것이라 한다.

     

     

    (468) '프랑스 박물관에서 진짬뽕 냄새가?' 루브르 박물관에 한국라면 자판기 들여놓자 수천명의 프랑스인이 박물관앞에 줄 선 이유 - YouTube

     

     

     

     

     

     

    [루브르 박물관의 역사]

     

     

      

     



    [루브루박물관의 입장권]

     

     

     

      

     



    [유리피라미드 천장반지하 광장]

     

     

     

     

     

     

     

     

       

     

     

     

     

    슐리관 입구를 들어서면 루브루박물관과 발굴관계 등이 정리되어 있다. 루브루의 역사다.

    군사목적의 성으로 있던 모습으로 생각되는 성의 모습을 볼 수있는 중세시대의 루브루 성을 볼 수 있다. 중세 루브루의

     

    해자를 보고 정신없이 다음 공간으로 이동했다. 고대 그리스관으로

     

     

     

     

     

     

     

     

     

     

     

     

     

     에게해 밀로 아프로디테신전 부근에서1820 4월 8일 농부에 의해 발견된 이 비너스는 프랑스 해군(쥘 뒤몽
    뒤르빌 해군사관-그리스 주재 프랑스 영사에게 보고)에 의해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었으며 1821년부터 지
    금까지 공개되고 있다. 발견된지는 200년이 채 안되었으나 대리석으로 제작된 것은 기원전 2세기라고 하니
    작품은 제작된지 2000년이 훨씬 넘었다. 그저 유명한 것이니까 해서가 아니라 정말 큰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작품이 지닌 포즈를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고 한다. ‘콘트라포스토’란 몸의 무게 중심 대부분을 한쪽 다리에 두어 머리에서 발끝을 연결하는 선이 S자 곡선을 이루는 포즈를 말한다.헬레니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움직이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완전한 해부학적 구조라는 것이다. 즉, 머리와 목, 어깨와 가슴, 복부와 하체 부분의 전반적인 비례가 완전하여 우리 눈에 거슬리는 것이 전혀 없다. 바로 완벽한 해부학에 의한 여인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의 목 부분의 주름부터 시작하여 복부의 복근에 이르기까지 해부학적 사실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권영준 교수
     밀로의 '비너스상'은 어떠한 과장이나 왜곡없이 여성의 인체를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비너스의 미'는 아름다운 여성 인체의 사실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완전한 아름다움 즉 조화와 시각의 완결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밀로의 비너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의 실체가 팔등신의 비례법이다.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5 : 8 이고, 상체에서 머리와 가슴의 비가 5 : 8, 하체에서는 허벅지와 종아리의 비가 5 : 8, 얼굴의 폭과 길이의 비가 5 : 8, 유두 간격과 엉덩이의 폭이 5 : 8 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로 황금비례에 의해 디자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밀로의 아프로디테 가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 하나 시간을 가지고 보지도 못하고 꼭 보아야할 것이 있다고 움직인다. 하긴 고대 그리스

    조각품 대영박물관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니 감상은 중요하다.

    사람들이 많이 몰린 그곳 고대 그리스 조각실 12번 방이다.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않고 가까이 멀리, 빙빙 돌고,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등 진지하다. 나 도 예외 일수는 없고 빙빙 돌았다.

    중고등학교 미술실에서 많이 보았던 그 밀로의 비너스다. 감회가 새롭다.

    파리오시대, 이집트관을 보지 않고 그리스 조각관으로 옮긴 것이다.

    옆의 작품 하나만 보고 밀려온 것이다.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밀로의 비너스로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밀로의 비너스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눈에 광채가 번뜩인다.

     

    하체의 걸친 옷이 금방 흘러내릴 것 같다.

     

    하루 종일이라도 앉아서 보고 싶다만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옮겼다.


     

     

     

     

     

     

     

     

     

     

     

     

     

     

     

     

        

     

     

     

        

     

     

     

     

    건물 천정이 아주 갈끔 매끄러웠는데 화려한 천장으로 바뀐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기야 현재 이전에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니

    드농관 1층의 화려한 천장화를 머리들어 쳐다보았다. 화려의 극치다. 금빛으로 휘황찬란하다.

     

     

     

     

      

     

     

     

     

     

     

     

     

     

      

     

      

     

      

    [사모트라케의 니케상]

     

    또 한 공간을 지나 다음으로 이동하는데 여기도 사람들이 많다. 조각상이 하나 보인다. 이름도 모르고 설명은 하는데 귀

    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눈에다 온 신경을 모아서인지.

    홀 가운데 공간을 이용한 것이 아니기에 조각상 앞부분 홀에 많은 사람들이........

     

    몸은 사람중 여인으로 보이는데 팔은 없고 날개 달렸다. 옆모습을 보니 날개도 길다. 날개는 무엇의 날개인가? 특히 고대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은 날개를 좋아한 듯 말에도 날래달리고 사람에게도 날개가 달리고 사자에게도 날개가 달린다. 에게해 사모트라케라는

     

    섬에서 발견되었을 때에는 더 많은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하나복구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또 오른쪽 날개는 파괴된 것을 복

     

    원한 것이라는 현지 안내인의 해설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릇듯 하다. 맞바람과 싸우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적이다.

    하늘 거리는 옷자락 힘이 넘치는 허벅지와 정갱이다.

    이 방면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여기와서야 이런 유명한 작품이 있구나 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이란다. 로마신화의 빅토리아다.

    그리스와 로마가 그린 승리의 여신은 다른가 보다.

    사모트라케 앞 시리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로도스 사람들이 세웠다는데

     

     

     

    [니케상의 해설판]

     

     

     

     

     

     

     

     

      

     

     

     

     

     

      

     

      

     

     

     

     

     

      

     

     

     

     

    니케상을 구경하고 다음으로 옮긴다.

    회화작품이다. 대작도 많다.

    이태리 프랑스의 작품들이란다.


    사람들로 붐빈다. 보기도 힘들다. 사진도 그렇다. 인파 때문에 두세번씩 찍어야 한다. 꼭 작품앞에서 찍어야 한다. 평생

     

    언제 또보랴 사진속에 그 작품을 넣는다.

     

     

     

     

     

     

      

     

      

     

     

     

     

    [가나의 결혼식-칼리아리 파올로 베로네세 (Caliari Paolo Veronese)1528-1588]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 중 가장 큰 그림은 바로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1528~1588)가 그린 '가나의 결혼식'이다. 세로 7m, 가로 10m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화면 안에서는 야외에 내놓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130여명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나라는 마을의 결혼식에 초대되었는데 연회가 끝날 무렵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성모 마리아의 부탁을 듣고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가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일으킨 기적이자 그가 이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희생당할 것임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로네세는 그 기적의 의미보다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연회를 그려내는 데 주력했다. 테이블은 화려한 도자기와 값비싼 은식기, 섬세한 유리그릇으로 가득하고, 하객은 남녀를 불문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화롭게 치장했다. 테이블 위아래를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애완견들조차 말끔하게 다듬고 온 이 연회는 당시 베네치아인들의 호사스러운 취향을 잘 보여준다.

    수도원의 식당 벽에 걸기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던 베네딕트 수도회는 반드시 해외에서 수입한 값비싼 안료를 사용하도록 계약서에 명시했다. 내용뿐 아니라 그림 자체도 비싼 사치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물질의 향연 속에서 결혼의 의미를 생각하는 이는 중앙에 홀로 고요히 앉아 있는 예수뿐인 듯하다. 어쩌면 그는 포도주 정도야 얼마든지 돈을 주고 살 수 있을 이 사람들에게 괜히 기적을 보여주었나 하고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2770.html

     

     

    [칼리아리 파올로 베로네세 (Caliari Paolo Veronese)1528-1588]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

    1528년

    ~

    1588년

     

    4월 19일

    ) 는

    이탈리아

    화가

    이다.

    르네상스 시대

    의 화가로서

    티치아노

    에게 큰 영향을 받아, 빈틈없는 구도와 화려한 색채의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주요 작품으로 <성모의 대관> <레위 집안의 만찬> <레비 가의 향연><가나의 결혼식> 등이 있다.

     

     

     

     

     

     

     

     

    [모나리자]모나리자(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의 다른 명칭인 "라 조콘다"는 한국어로 "조콘도(Giocondo)의 부인"이라는 뜻이 된다.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

    스푸마토

    '(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이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1] 이 그림에는 황금비율인 1:1.618의 비율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있다. 코와 눈썹의 길이와, 턱과 코의 길이의 비율, 인중과 입술의 길이와 입술과 턱의 길이의 비율, 얼굴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 등 황금비율이 많이 들어가 균형잡힌 느낌을 준다.[2]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지오 바사리

    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B%AA%A8%EB%82%98%EB%A6%AC%EC%9E%90

     

     

      

     

     

     

     

    [모나리자 앞의 장사진 엄격하게]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

    이자

    조각가

    ,

    발명가

    ,

    건축가

    ,

    기술자

    ,

    해부학자

    ,

    식물학자

    ,

    도시 계획가

    ,

    천문학자

    ,

    지리학자

    ,

    음악가

    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B%A0%88%EC%98%A4%EB%82%98%EB%A5%B4%EB%8F%84_%EB%8B%A4_%EB%B9%88%EC%B9%98

     

    가까이 가보기도 힘들고 멀리서보았다. 잔잔한 미소가 이곳을 찾은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다. 앞에는 방탄유리로 그는

    철저히 보관되고 있다. 영원히 인간사에 남을 모나리자다. 1000년 후에도 저곳에 자리하고 있을까?

     

    더 가까이서도 보지 못하고 미소짓는 모나리자를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 안내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자화상]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1748년

     

    8월 30일

    ~

    1825년

     

    12월 29일

    )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속하는 유력한

    프랑스

     

    화가

    로, 이 시대의 탁월한 화가로 평가 받는다.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6년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년

    전쟁 중의 장면을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전쟁의 역동성과 혼돈·흥분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련의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갑작스레 모든 것이 일순 정지한 듯 한 고요함과 정적이 흐르고 그림이라기보다 조각 같은 견고함이 느껴진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신고전주의의 거장인 자크 루이 다비드다.

    신고전주의는 그리스·로마시대인 고전으로 돌아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이상적 미를 다시 되살리고자 했던 양식이다. 그래서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들도 그리스 조각상처럼 누드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혼돈과 긴장의 순간을 가장 잘 전달하고 있는 것은 오른편에 보이는 흰 말과 갈색 말의 눈일 것이다. 조각적 덩어리 감을 가질 정도로 입체적으로 그려진 말갈기와 조금 대조적으로 말의 눈에는 회화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이 서려있다. 이 그림은 전쟁 장면이라기보다 전쟁을 중재하는 장면이다. 중앙에 서서 창과 칼로 서로를 겨누는 두 남자를 막아서고 있는 여인은 사비니 출신의 여인인 헤르실리아이다.

    헤르실리아 주변에서 아이를 방패삼아 남자들을 말리고 있는 여인들도 사비니 여인들이다. 오른쪽에 로마라는 글자가 새겨진 방패를 들고 창을 들고 있는 남자는 로마 건국의 기원인 로물루스다. 사실 로마는 이주자들로 건국된 나라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전사들이었다. 로마가 건국되긴 했지만 여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지 않았다. 로마는 국가의 번영과 지속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이웃나라 여자들을 무력으로 강탈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대한 잔치를 벌여 이웃부족 사비니와 주변 부족 국가들을 초청했다. 술과 기름진 음식으로 잔치의 흥이 고조에 달했을 때 로마인들은 사비니족을 기습하여 남자들을 제압한 후 그들의 여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다. 기습공격을 받은 사비니 남자들은 분을 삼키며 퇴각했고 사비니의 여자들은 로마에 남게 되었다. 삼년 뒤, 사비니 남자들은 치욕을 되갚기 위해 로마로 진격했고 그들은 격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것은 삼년 전에 끌려갔던 사비니의 여인들이었다. 이미 그녀들은 로마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에게 로마와 사비니의 전쟁은 아버지와 남편의 전쟁이었기에 평화와 중재를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화가들도 사비니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대부분은 여인을 강탈하는 장면인데 반해 자크 루이 다비드만은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담은 중재의 장면을 그렸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강성정책으로 문화계를 휘둘렀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아무튼 다비드는 5미터가 넘는 이 작품을 루브르에서 전시했고 입장료를 받았다. 전시는 성공해서 화가는 그 수익으로 땅과 저택을 구입한 성공한 부르주아가 되었다.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265499&cloc=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의 The Oath of the Horatiioath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84년

     

     

     

     

     

    [앙투안 장 그로(Antoine Jean Gros)]의 에일로 전장의 나폴레옹 [Napoleon on the Battlefield of Eylau]

    앙투안 장 그로(Antoine Jean Gros,

    1771년

     

    3월 16일

    1835년

     

    6월 25일

    )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이다. 훌륭한 초상화가이며, 특히 전쟁화에 독보적인 명성을 나타내고 있다.그로는

    파리

    태생으로 아버지도 화가였고, 14세에

    다비드

    에게서 배웠다. 그 후 1793년에 홀로

    이탈리아

    로 가서,

    제노바

    에서

    루벤스

    의 격정적인 작품에 감화되어 심취했다. 자유분방한 천성과 주위의 모순으로 고민하다가

    센 강

    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앙투안 장 그로(Antoine Jean Gros)]의 《자파에서 페스트 환자를 병문안하는 나폴레옹》

     

     

     

     

     

     

     

    제리코(1791~1824)의메두사호의 뗏목 [Raft of the Medusa]

     

    메두사호의 뗏목 [Raft of the Medusa]-낭만주의의 영향과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영향으로 웅대한 스케일의 역동적인 회화를 그렸던 제리코의 뛰어난 작품이다. 실제로 있었던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의 침몰사건 후 당시 뗏목으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치밀한 인체의 포즈들과 절망 속에서 수평선 멀리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리다 환호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파도와 뗏목의 흔들림, 구름의 번지는 모습, 근육의 다양한 표현은 작가의 치밀한 제작과정을 말해준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리코1791. 9. 26 프랑스 루앙~ 1824. 1. 26 파리. 프랑스의 화가.낭만주의 미술의 전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리코는 멋쟁이 신사에다 열광적인 승마사로서 극적 성격이 강한 그의 회화는 화려하고 정력적이며 다소 병적인 그의 개성을 반영하고 있다. 학생시절에 프랑스의 화가 카를 베르네에게서 영국 스포츠 미술의 전통을 배웠으며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또한 아카데미 화가 피에르 게랭 문하에서 고전적 조형법과 구성법을 익혔다. 게랭의 또다른 제자였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고 거기에서 자기 예술의 중요한 출발점을 찾았다.

     

     

     

     

     

    아리 셰페르의《단테와 버질 앞에 나타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혼백》

    형수(프란체스카)와 시동생(파올로) 사이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간음한 죄로 비참하게 살해되어 지옥을 떠도는 망령이 됐다. 이 그림은 지옥을 찾은 시인 단테와 버질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1513-1515, 반항하는 노예미켈란젤로1513-1515, 죽어가는 노예

     

     

      

     

     

     

      

     

    기둥도 웅장하고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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