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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박 겉핥기 유럽 일부여행기
    나의 여행기 2009. 11. 25. 11:45

    여행기

    제1일

    인천국제공항 출발[LH713, 15:00]

    퇴직하고 집시림과 외국여행을 하고자 여행상품을 많이 찾아보고 시기를 저울질 어느 때가 좋을까 생각했으나 신종

    풀루로 머리가 뒤숭숭.

    11월 4일 결혼기념일도 돌아오고 퇴직도 했고 머리 좀 식힐겸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자 했다. 미리 출발하여 11월 4

    일 외국에서 맞으면 어떨까? 아니면 11월 4일 출발은 어떨까? 11월 4일 출발을 하고자 상품을 찾아 보았다. 11명 정

    도 예약이 되어있어 되겠구나 했지만 하루 사이에 인원이 다 차 상품을 포기.

    다음 출발 가능한 것을 보니 7일이다. 이 상품을 사야겠구나 생각하고 예약. 이번에는 자리가 하나밖에. 그러나 가능

    하다고 한다.

    유럽은 처음인데.........

    상품 내용 중에 선택관광이 여럿이다. 사실 여행경비로 이렇게 써보기도 처음인데. 선택관광을 다 한다고 생각하니

    여행경비에 반 정도 . 선택관광을 안할 수도 없고. 그래 하자 . 언제 또 갈 수 있나?

    파리에서 리도쇼 180-200유로 둘이면 360-400, 에펠탑전망대 세느강유람선 70유로 둘니면 140유로, 로마에서 벤츠

    관광 50유로 둘이면 100유로, 베니스에서 수상택시 50유로 둘이면 100유로, 곤돌라 관광 50유로 둘이면 100유로.

    다하면 840유로다. 분위기 보아가며 선택하자하고 900유로만 환전했다.

    핸드폰 충전과 카메라 충전을 위해 여행용 콘센트 하나사고 준비는 안했다. 물도 그렇고 식사도 그러니 준비하는 것

    이 좋겠다고 했으나 사람사는 곳인데 하고 준비는 안했다.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물건을 더 넣어갈 수 없었다.

    7일 아침 가방정리하고 택시로 일산까지. 그곳에서 3300번 공항버스를 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2시 아직시간은

    3시간이나 남았다. 짐 부치고 수속 밟고

    한침 기다려 기내에 오르니 이제 가는구나.

    11시간 이상 비행기를 탄다니..........걱정이다. 자리도 좁고. 밖은 깜깜하고. 루프트한자 독일항공이라 외국인 슈튜

    어디스 다행이 한국인 아가씨가 있었다. 집사람은 자주 화장실을. 사실 11시간 이상을 앉아 있기란 쉽지 않았다. 기

    내식에 한식이 있어 다행이었다. 볶음 고추장이 있었다. 하나는 먹고 하나는 챙겼다. 비행 안내를 보니 중국상공으로

    우랄산맥 상공으로

    현지 시각으로 7시경 프랑크프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다리가 아프다. 경유지라 공항밖으로 나가자도 못하고 런던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이동했다.

      


    공항이 대단히 크다. 하기야 이곳을 거쳐가는 승객이 많아 복잡복잡하다.

    11시간이나 걸려 왔지만 춥발할때보다 4시간 정도 늦은 7일저녁 7시경 영국은 한 시간 차이가 나니 6시경연결편으로 프랑크푸르

     

    트 출발[LH4742,20:10] 1시간 40분 정도 지나 런던에 공항가까이 밖을 내다보니 야경이 좋다. 여기 저기서 폭죽을 많이 터뜨린

     

    다. 축제인가? 그것도 아닐테고 축구 우승을 했나? 그것도 아니고 . 하늘에서 보니 여기저기서 폭죽을.

    아 도착했다.

    가이드의 꼼꼼한 안내로 별 이상없이 호텔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7일 오후 3시에 출발했는데 이곳은 7일 9시 경이다. 근 14시간

     

    걸려 왔건만 . 서쪽으로 왔으니.


     

    입국심사 받고 나왔다.

    환전소가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0%. 절대 이익을 남기

    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래야지. 서비가 좋다.

    그 옆에는 나라별 외환시세가 보인다.

    자세히 보았으나 원화는 보이지 않는다. 실망했다.



    캐나다, 체코, 이집트, 유로, 항가리, 홍콩, 일본, 러시아, 뉴질랜드

    폴란드, 남아프리카, 스웨덴, 스위스, 타일란드, 터키, 미국,16개국이다.

    특히 commisson 15%/3%윗 그림 0%와 대조된다. 금융관계 문외환인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히드로공항]

     

    [히드로공항터미널]

     

    좀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낯설다.



    이 호텔에 도착. 45유로가 눈에

     

    [히드로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St Giles hotel 이 있었다]

     

    호텔방은 소박하다. 특별한 장식이 없다.


     

     


    [기내에서 챙겨온 볶음 고추장 호텔의 식권]

     

     

        

     

    이곳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먹은둥 만둥 배가 고프다. 피곤하다. 우리나라 시각으로 8일 아침일텐데 이 곳에서

    는 밤이라 자야한다.

    제2일

    현지 시각으로 11시가 넘어서 피곤한 상태서 잤건만 오전 3시에 눈이. 4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불편해선가. 날이 밝

    으려면 3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시차 적응도 그렇고 불안도 그렇고 낯선 잠자리도 그렇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꽤

    나 반복했다. 잠이 많은 집사람도 4시에 눈을 떴다.

     

    치락 뒷치락 .잠간 눈을 붙여 보았으나 감기지 않는다.

    일어나서 이것 저것 뒤지며 시간을 보냈다.텔레비젼을 틀어도 영어를 잘

     

    모르니 눈 뜬 장님이요 귀열린 벙어리다.

    그림은 볼 수 있어 일기예보는 대충 볼 수 있다. 비 온다는 소식은 보이

     

    지 않았다. 7시가 되서 식사하러 내려갔다. 늦잠을 잔 사람은 보이지 않

     

    았다. 모두 시차 적응이 되지않아 일찍 일어났다고 한다.

     

    말만 듣던 현지에서의 아침 식사 빵과 우유 뿐이다. 배가 고풀 것을 염려해 빵 두 개를 남보다 더 먹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호텔앞 왕복 2차선 도로다. 횡단보도는 경광등으로 신호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보이지 않고 이런 집들뿐이다.

        

    짐을 정리해 이 버스에 싣고 젊은 영국 기사에게 안전을 맡겼다.

    현지 안내원이 함께했다. 재치넘치는 안내로 우리를 가끔 웃게했다. 이

     

    버스는 우리 한국 관광객만 수송하는 버스인가 보다. 현 영국내에서 한글

     

    로 된 대한민국을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한국인도 이제 세계 여러나라를

     

    관광하는 많은 선진 외국인들과 함께한다.

     

     

      

     

     

     

    지붕에는 텔레비젼 안테나가 집집마다.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안테나를

    보기가 점점 어려워 지는데 말이다.


     

     


     

    가끔 이런 현대식 건물도 보인다.

    그러나 시내로 들어갈 수록 
    벽돌과 돌로만 되어있는 집들뿐이다.

    지붕에는 텔레비젼 안테나 집집마다 약간씩 그 디자인 이 좀 다르다. 큰 길가 집 아

     

     

    래층은 장사를 한다. 크지 않은 상점들이다. 길은 전체적으로 좁다. 대형차인 버

     

    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돌과 벽돌 전체적으로 무겁다. 어둡다.차다. 다 골동품미요, 미

     

    술품이다. 우리의 목조보다는 오래갈 것이고

    유지비도 적게 들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개축은 쉽지 않을 것이고 항

     

    상 그렇게 변함없는 모습일 것이다. 영원히 이들은 좁은 길에서 어렵게 답답하게 살 수밖에 없다. 우리 입장일 뿐이겠지.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니 말이다.

             

     

    길에는 횡단보도가 이렇게

    LOOK RIGHT

    보라 오른쪽[오른쪽을 보라]

    없을 것 같은에 이들은 사람의 안전을

    더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나라도 요 것 들여와서 횡단보도에써 놓는다면 횡단보도 사고가 덜 날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외국인들을 위해 표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심한 배려가 아닌가.

    런던의 젖줄 테임즈 강이다. 좁다 한강보다. 런던은 이 테임즈 강을 중심

     

    으로 발달되어 있다고. 예로부터 인간들은 물을 가까이하고 살지 앟았는

     

    가? 물이 좀 탁하다.

     

     

     

     

     

     

     



    영국의 런던의 명물 빨간 2층버스다. 승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길이 좁아 답답해 보인

    다.

     

     

     

     

     



    으시시한 디자인의 건물이다.

     

    나는 들어가 보고 싶지 않다. 들어가라는 사람도 없지만. 공포의 상점

    버스 정차후 테임즈 강가로 나갔다. 사진에서 많이 본 그 다리. 아름답다.


     

      [런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명한 다리로 1894년 완성되었다는데 전체는 3경간(三徑間)의 구성으로 약 80m

    인 양쪽 경간은 현수교이고 약 60m인 중앙 경간은 도개형(跳開型)의 가동교(可動橋)로 되어 있다. 각 경간에는 장중

    한 탑이 있고, 탑의 상부에는 중앙 경간을 건너갈 수 있는 보도교가 마련되어 있다.]-야후백과

    왼쪽 경간은 보수중이었다. 한강처럼 강폭이 넓으면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되었다.

     

        

     

     

    타워 브리지(Tower Bridge)

    타워 브리지(Tower Bridge)는 영국 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즈 강 위에 도개교현수교를 결합한 구조로 지은 다리다. 런던 탑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1886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894년에 완성한 이 다리는 오늘날에는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수력을 이용해 개폐했지만 오늘날에는 전력을 이용하고 있다.

     

     

        

     

    전쟁에 참여했던 전함도 테임즈 강에 전시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던 그들의 선조를 기리는 교육장으로 활용되

    고 있었다.


     

     

    현대 건축가가 설계한 시청 건물의 일부다. 특이한 디자인이다.노먼 포스터 경(Lord Norman Foster)이 설계하고

    유리 달걀(The Glass Egg)이라고도 불리는 1억3천5백만달러의 건축비가 들어간 10층짜리 45미터의 시청건물이

    다. 달걀보다는 다슬기가 더 비슷하다.

     

    London City Hall

    영국 런던 템즈 강변에 있으며,유리달걀(the glass egg)이라고도 불리우며 높이 45m, 총 10층이며 건물 외벽은 유리로 되어있습니다.1998년 공사를 시작해 2002년에 문을 열었으며 총 공사비용이 640억 원.

    이 특이한 형태의 건물을 시공하기 위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애니메이션을 이용하였고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하고 영군의 엔지니어링 컨설턴트인 오브 아럽이 함께하였다고 함.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에너지 절약형 친환경 건축물이라는 점인데 건물을 남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어 직사광선을 피하고 자연적으로 그늘이 지도록하였고 패널 아래쪽에는 단열판을 설치하여 열손실을 줄였다고. 또, 창문을 통해 자연 환기를 유도하여 냉각기 가동을 줄였고 냉방은 2개의 홀에서 나오는 냉수를 이용하여 다시 화장실에 사용. 그리고 건물 모양 자체도 둥근 형태로 사각형 건물에 비해 유지비가 절감.

    런던 시청은 건물의 외곽을 따라 도는 내부 경사로를 올라가면서 시청 회의실을 볼 수 있으며 건물에는 방문객을 위한 안내소, 카페, 전시실 등이 있다고 합니다. [출처] 세계건축물, 런던 시청 (London City Hall)|작성자 영광건축

     

        

     

    강물은 탁하고 위에서 내려다 보기엔 지저분하게 보인다. 푸른물이 있을 수 없는 곳으로 보여 안타깝다. 저 물까지

    맑은 푸른물이라면 금상첨화겠지.

     

    River Thames

     

    영국의 템즈강은 런던을 거쳐 북해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우리 나라의 한강과 같이 런던의 도시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템즈강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러 종류의 담수어가 살고 있던 깨끗한 하천이었으나, 산업 혁명과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한 산업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죽음의 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요구와 함께 정부가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로 여겨 적극적으로 수질 개선 정책을 실시한 결과 깨끗한 도시 하천 중 하나로 개선된 사례이다.

        

     

    런던아이라고 해서 아이인줄 알았어요. 런던아이 다 영어지요. 이것을 타볼 계획은 되어있지 않지만 밤에 이것을 탄

    다면 런던의 야경은 잘 보이리라 . 꽤 크다.32개의 관람차 한바퀴 도는데 약 30분 정도. 자전거 바퀴처럼 설계되었다.

    아 배고프다.

     

    London Eye

    런던 아이 (영어: London Eye) 란 영국 런던 템즈 강변에 위치한 대형 대관람차를 말한다. 높이가 135m (443ft) 에 달하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대관람차이다. 또한 영국에 있는 관광지들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로 꼽히며, 매년 350만 여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1] 2011년 1월 20일부터 EDF 에너지 회사가 런던 아이를 3년동안 공식 스폰서로 후원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런던 아이는 공사가 마무리된 1999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관람차였고, 2006년 160m의 난창지싱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2008년 165m의 싱가포르 플라이어 (싱가포르)에게 자리를 빼앗길 때까지 기록을 유지했다.

     

     

             

     

        

      

             

     

     

     

    말로만 많이 들었던 영국의 국회의사당

    야! 와!

    저 시계탑은?

    걍 쳐다보기만 했다.마냥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시간과 돈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올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다음에 갈 기회가 있다면 가까이가서 내부를 보리라.

     

    런던 국회의사당 - Houses of Parliament

    [런던 템스강변에 있는 빅토리아왕조 최초의 대규모 건축물. 고딕복고 양식의 대표작이다.
    16세기 이래 국회의 회의장으로 이용되어 온 웨스트민스터궁전이 1834년 소실되자 <고딕 또는 엘리자베스왕조 양식>이라는 조

    건으로 설계를 공모하여 건설한 것이다. 당시에는 <웨스트민스터 신궁전>이라 불렸다. 설계자는 C. 배리였으나 세부설계는

    A.W.N. 퓨진이 맡았다. 1840년에 착공하여 20여 년이 소요되었다.
    지붕의 구조는 철골조이며 공조설비(空調設備)도 갖춘 근대적 건축물이었다. Charles Barry and Augustus Pugin의 디자인이 당선되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뛰어난 예술가들과 합세해 만들어진 고딕 스타일의 의사당 건물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물 정면의 길이가 300미터가 넘고, 1천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다.

    시계탑 내의 대시종(大時鐘)은 공사 책임자 B. 홀의 애칭을 따빅벤(Big Ben)이라 이름붙였다. 의사당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원되었다.]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시계탑에 달려 있는 큰 시종(時鍾). 무게가 13.5t이나 되며, 15분마다 묵직한 소리가 템스강 위로 울려

    퍼진다. 국회의사당은 1850년에 완성되었고, 초대 시종설치위원장이던 B. 홀경(卿)의 애칭 <빅벤>을 따서 이렇게 불린다. 시

    계탑은 높이 97m의 사각형이며, 4면에 지름 7m의 문자반이 있다.아직도 손으로 태엽을 감는 전문적인 시간지기가 있다. 꼭대기 조그만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의회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다음으로 간 곳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현지 안내인의 설명을 많이 들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없다. 말로만 들었던 그 사원 뭔 사원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저 생

    소할 뿐이다. 성당으로 애초 지어졌으나 지금은 성공회 총 본부라는 것이다. 걍 눈으로 멀리서 보았을 뿐이다. 사실 수박 겉핥기

     

    도 못하고 멀리서만.........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영국 런던의 한 구. 면적 21㎢. 인구 18만 1279명(2001). 동쪽의 시티오브런던이 영국의 금융·무역의 중심인 것과는 달리 웨스트민스터는 정치의 중심인 옛 웨스트민스터지구와 상업·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루는 웨스트엔드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옛 웨스트민스터지구에는 19세기 무렵부터 법원·의회·중앙관청이 모여 있으며 영국 국정의 중심이 되어 있다. 국립미술관·로열앨버트홀·코벤트가든극장 등의 문화시설과 버킹엄궁전·웨스트민스터대성당 등 유서깊은 건축물 외에 레스토랑·호텔·극장, 각종 상점이 집중되어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
    [웨스트민스터의 역사]
    (옛 웨스트민스터지구는 소니섬이라 불리었던 템스강 왼쪽에 있는 섬으로, 그 서쪽은 늪과 못이 많은 지역이었다. 웨스트민스터대성당은 604년 무렵 에섹스의 사에벨푸트왕이 그 섬에다 세인트 피터대성당을 세운 데서 연유한다. 데인인의 침입으로 인하여 파괴된 후 10세기의 수도원 부흥시대인 951년 에드거왕이 베네딕토파 수도원으로 부흥시켰다.
    11세기 전반에 크누트왕이 수도원 근처에 궁전을 세웠는데, 에드워드왕(참회왕;재위 1042~1066) 시대에 수도원과 궁전을 크고 훌륭하게 개축한 이래 이 고장이 영국 국정의 중심지로 되었다. 1066년 노르만정복 후 윌리엄 1세가 이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올린 다음부터 역대 영국왕의 대관식 장소가 되었다. 윌리엄 2세가 세운 궁전의 홀은 중요한 법정이 되었으며, 리처드 2세의 퇴위, 토머스 모어, 찰스 1세 처형 등의 선고가 내려졌다. 13세기 무렵부터 수도원의 성체용기성당(聖體容器聖堂)이 국고수납소로 바뀌었으며 성직자 공관이 서민원(庶民院)의 터전이 되었다.
    1512년 궁전 대화재 후 궁전이 왕궁으로 쓰일 수 없게 되자 서민원을 궁전의 1실에 흡수하여 궁전이 의회의사당이 되었다. 수도원은 헨리 3세 이후 왕의 무덤이기도 했는데, 1539년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에 의해 수도원의 소령(所領)은 몰수되었다. 공원인 하이드파크·세인트제임스파크는 그에 의하여 왕의 사냥기지로 개설된 옛 수도원령이다. 헨리 8세가 세인트제임스궁전을 왕궁으로 삼았던 무렵부터 정부고관도 주변에 저택을 마련하였다. 버킹엄궁전은 빅토리아여왕 이후의 왕궁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역사]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은 13세기 이후에 영국 왕의 무덤이었으며 대관식장이고 왕가의 결혼식장이었다.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엄격한 프랑스식 고딕 양식 본당에서부터 놀랍게 복잡한 헨리 7세의 예배당까지 아주 다양한 건축 양식을 지닌 건물이다.
    이곳의 대사원 교회는 10세기에 지어졌지만 현재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고딕 건축양식은 1245년 헨리 3세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되었다. 대관식 교회로서의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대사원은 16세기 중반에 있었던 헨리8세의 영국내 수도원 건물에 대한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버킹검 궁전 앞에 신선하고 아기자기한 세인트 제임스 공원이 있고 그곳을 건너면 화이트 홀. 트라팔가에서 시작하는 남북 1Km의 넓은 길이 뻗어 잇다. 수상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도 바로 화이트 홀에서 갈라서는 골목길이다. 화이트 홀이 끝나면 네모진 파라먼트 광장이 나온다. 윈스턴 처칠상이 여기 저기에 서 있다. 광장의 동쪽이 웨스트민스터 궁(지금의 국회의사당)이고, 남쪽이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이다.
    웨스트민스터 궁은 16세기까지 왕이 거처한 궁궐이었는데 바로 길 건너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은 왕실 직속의 특수 교회이다. 이 교회 안에 묻혀 있는 역대 왕만 해도 17명이 넘는다고 한다. 공식 명칭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성 피타교회'요 사람들은 그냥 '애비(Abbey)' 라고 부른다.
    애비가 특수한 교회라는 것은 역대 임금이 이 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져왔다는 사실이고, 왕실의 중요 혼사 역시 여기서 거행된다는 것이다. 영국 교회의 총본산은 런던에서 동남쪽으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켄터베리에 있는 대성당이고 켄터베리 대주교가 최고 성직자인데, 왕실의 경사에는 켄터베리 대주교가 애비까지 와서 집전하는 것, 가히 왕실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애비는 웅장한 미관이 세계적이다. 길이 1백56m 너비 61m 그리고 높이 31m이니까 규모에 있어서도 세계적이다. 특히 서쪽 정문 위의 2중탑은 볼수록 장중하기 비길 데 없다.
    애비 안은 벽면이나 바닥 할 것없이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묘비요, 기념비다. 누구나 정문에 들어서 몇 발자국 가면 녹색 대리석에 새겨진 처칠경의 기념 석판이 깔려 있음을 본다. 워낙 큰 글씨로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remember winston churchill)'의 세 단어가 새겨져 있어 금방 눈에 뛴다. 바로 옆에 '여왕과 의회의 뜻에 따라 수석 사제와 수사는 1965년 9월 15일 영국의 전투 25주년을 기하여 이 돌을 이곳에 안치한다'고 적혀 있다. '영국의 전투'란 히틀러가 총력을 가했던 밤낮 안가리고 영국에 맹폭격을 가했던 어려웠던 제 2차대전 초기를 말한다.
    처칠은 마땅히 웨스트민스터에 묻혔어야 할 국가유공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처칠 스스로 유언으로써 그것을 사양하고 그가 어렸을 때 다니던 한적한 시골 교회 옆뜰에 묻혔다.
    애비에 묻혀 있는 것은 반드시'왕후장상'들만은 아니다. 각계각층, 영국 역사에 찬란한 빛을 뿌린 위인들이 묻혔거나 또는 '기념'되고 있다. 처칠 기념비석의 왼쪽에 애틀리, 맥도날드, 베빈 등 노동당 및 노동운동지도자의 기념비들이 바닥에 깔려 있고 몇 발자국 더 가면 아프리카 탐험가요 기독교 전도에 심혈을 기울인 리빙스톤의 묘가 나타난다.
    좀더 가까이 들어가면 성가대석 오르간 왼편에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묘비, 좀더 들어가면 노예해방의 선구자 윌바포스의 이름이 보인다. 애비는 흔히 보는 장방형의 그런 단순한 성당이 아니다.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십자형으로 뻗는다.
    제단의 좌측, 그러니까 북쪽 입구까지는 대영 제국을 건설했던 대재상들. 피트, 파마스톤, 카닝,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톤, 피일 등의 기념비가 몰려 있다. 그러나 아마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제단 남쪽 입구 일대에 있는 '시인의 코너'가 아닐까. 여기에는 영문학을 빛낸 시인 작가를 비롯하여 예술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영문학의 원조 초오서의 묘비를 비롯하여 롱펠로우, 블레이크, 드라이든, 바이런, 밀턴, 엘리어트, 그레이, 존슨 박사, 세익스피어, 워즈워스, 골드스미스, 키플링 등의 묘비, 기념비 아니면 석상이 모셔져 있는가 하면 개릭(연극인), 아빙(연극인), 헨델(음악가)등의 이름도 보인다. 이들 시인, 작가, 예술가들이 불후의 공을 남겼다는데, 어찌 '왕후장상' 못지 않게 두고두고 예우하는 나라가 어디 흔한가.
    애비는 가히 영국의 넋이 잠들고 있고, 영국의 얼이 살아 있는 숙연한 성역인데, 매일같이 수 천 수만의 내외국 사람이 경의를 표하고 특히 영국 사람들한테는 스스로의 전통과 역사와 무엇보다 옛 영광을 주입시키는 신전이라는데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사원은 13세기 이후 영국왕의 무덤이요, 대관식 장소이고 결혼식장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대학자 정치가 예술가

     

    시인들의 묘비, 기념비,석상이 모셔져 있는 영국의 자존심이다.아 아쉽다. 1박을 하고서라도 입장 관람이 필수적이었는데. 관람

     

    중에는 그저 아 멋진 건물이다. 중요한 건물이다. 역사가 있는 건물이다 정도로 그냥 마쳤는데.어쩐지 사원 꼭대기에 있는 영국

     

    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니 영국 그 자체라고.

    워낙 큰 건물이라 한 눈에 볼수도 없고. 분위기만 느끼고 돌아갈 수밖에.

    코끼리 다리만 보았다. 그것도 멀리서

     

    자세히 더 볼 수도 없고 버킹검궁으로 향했다.

     

    인파다. 밀린다.

    여기서부터 버킹검궁이란다. 자연스러운 정원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정원상으로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규모에서는

     

    좀 작을까? 특히 수종으로는 푸라타너스가 많다. 호수도 있고 새들도 사람과 함께한다. 물 옆길을 따라 내려가니 사진으로만 가

     

    끔 보았던 버킹검 궁이다. 여왕이 테라스에 나와 시민들에게 손 인사를 하던 그곳. 이날은 마침 우리의 현충일과 같은 날. 여기저

     

    기에 훈장을 달고 다니는 연세 든 어른들이 가끔 보였다. 궁중 음악대 밴드소리도 들린다.

      

     

     

      

     

     

       

     

     

      

     

     



    [버킹검 궁 정원=성제임스 공원]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

     

     

     

     

     

     

     

     

     

     

     

     

     

     

     

     

    [버킹검 궁]

     

    버킹엄 궁전 [Buckingham Palace]

    18세기초에 버킹엄 공작 가문을 위해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 1761년에 조지 3세가 왕비를 위해 이 궁전을 사들인 뒤에 '왕비의 집'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1825년 존 내시가 조지 4세를 위해 개축했다. 그가 설계한 정원쪽(서쪽) 정면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동쪽에 있는 몰(Mall) 정면은 1913년에 애스턴 웨브 경이 빅토리아 여왕 기념상의 뒷배경으로 어울리도록 다시 설계했다. 국왕으로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처음 이 궁에 살았다. 국왕이 궁전에 있을 때면 왕실기가 휘날리고 날마다 근위병 근무교대식이 벌어진다.

     

    점심을 먹으러

     

      

     

    이 날 들어간 식당의 점심상이다. 기본으로 놓여있는 것은 딱딱한 빵과 물뿐이다.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식탁도 작고 의자도 작고 비비고 앉아야 겨우 앉았다. 요기만 했을 뿐이다. 현지 안내인이 미리 알려주

     

    었기에 이해되었다. 우리 하고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점심 먹고 나와 주변을 . 2층 뻐스도 보이고 길가 마땅한 주차장은 없다. 음식점 앞 팔손이가 특이하다.

     

    다음으로 트라팔가 광장을 찾았다.

     

    넬슨제독의 전승 기념탑이 있는 이곳 사전지식없이 갔기에 대충보았다. 동상이 여기저기에 분수가 있고 사자상이 있고 오밀 조밀

     

     

    한 공간들이 함께한 그런 광장이었다. 좀 복잡하게 보았다. 이곳을 10분 정도로 휘......참 뭐 보았을까? 수박 겉만 핥았다. 전승

     

     

    기념광장이라 볼 수 있다.

     

    광장이라 평면의 넓은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방이 건물이요 동상,기념물등이 많았다.

     

      

     

     

     

     

     

     

     

    허레이시오 넬슨(Horatio Nelson)

     자작(Horatio Nelson, 1st Viscount Nelson, KB, 1758년 9월 29일~1805년 10월 21일)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영웅으로 부상하였으며, 전쟁이 한창중이었던 1813년 로버트 사우디가 그의 생을 노래한 시를 쓰기도 했다.

     

    허레이시오 넬슨은 1758년 노포크의 버넘(Burnham) 마을에서 11명의 남매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에드먼드 넬슨(Revd Edmund Nelson)이었으며, 오포드(Orford)의 제1 백작이자 영국 왕실의 사실상 총리였던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경의 증손인 어머니 캐서린 넬슨(Catherine Nelson)은 그가 9세가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넬슨은 노스 월셤(North Walsham)의 패스턴 문법 학교(Paston Grammar School)에서 간단한 교육을 마치고 1770년 12세의 나이에 해군에 입대하였다. 1771년 1월 1일 그의 해군 경력은 평범한 선원이자 키잡이로 시작되었고, 넬슨의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Maurice Suckling) 선장이 그 배를 지휘하였다. 얼마 후 해군 사관생도가 된 넬슨은 본격적인 장교 훈련을 마쳤지만 사실 그는 일생동안 배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1775년 해군 감사관(Comptroller)이 된 서클링은 그의 지위를 통하여 넬슨의 빠른 승진을 도와주었다. 1777년 부관이 된 넬슨은 동인도로 배치되었다. 그는 영국 해군 부관의 직위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였으며, 20세가 된 1779년 6월 프랑스로부터 나포된 대포 28문의 프리깃함 힌친브로크(Hinchinbroke)의 지휘권을 받았다.

    1780년 넬슨은 니카라과의 산 후안(San Juan)에 있는 스페인 요새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였다. 공격은 완패로 끝났지만 넬슨의 노고를 높이 산 덕에 비난은 거의 없었다. 이후 말라리아에 걸린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와 일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완치된 그는 앨버말(Albemarle)로 발령받아 1783년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 독립군과 싸웠다.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은 오래 가지 않았고, 넬슨은 곧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지중해 총사령관의 임무를 맡았으며, 1803년 HMS 빅토리(HMS Victory)호를 받아 프랑스 툴롱(Toulon) 항구 봉쇄에 참가하였다. 이후 그는 2년간 육지에 발을 디딜 새가 없었다.

    1804년 4월 23일, 넬슨은 바다에 머물며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에 올랐다. 1805년 초 프랑스 함대는 툴롱 항구를 출발하여 서인도로 향하였다. 이 함대의 추적에 실패한데다 건강이 다시 악화된 넬슨은 영국 머튼(Merton)으로 퇴역하였지만 2개월도 안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1805년 9월 13일 넬슨은 스페인 카디스(Cadiz) 근방에서 연합하려는 스페인과 프랑스 함대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항하였다.

    1805년 10월 21일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규모 군대를 모아 다시 한 번 영국에 대한 침공에 나섰다. 영국 해협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하기에는 해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유럽 각지에서 배를 끌어모았다. 이윽고 33척의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는 피에르 샤를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의 지휘하에 카디스 항을 출발하였고, 넬슨은 27척의 배를 끌고 이에 맞섰다.

     


    두 함대는 결국 전투에 들어가고, 넬슨은 자신의 빅토리 호 후미 돛대에 '영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당초 넬슨은 '영국은' 대신에 '넬슨은'을, '기대한다(expects)' 대신에 '믿는다(confides)'를 쓰고자 하였지만 문구의 영향력을 고려한 신호 담당의 제안으로 변경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기함 뷔상토르(Bucentaure) 호에 심각한 손상을 안긴 빅토리 호는 르두타블(Redoutable) 호로 돌진하여 뒤엉켰고, 르두타블 호의 전투실 상부에 있던 프랑스 저격수들은 빅토리 호의 갑판을 훤히 내려다보며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쏜 탄환은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하여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혔다. 넬슨은 이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네 시간 동안 의식을 잃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였고,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것을 확인하고 전사하였다. 넬슨에게 죽음을 안긴 탄환은 그의 몸에서 제거되어 현재 윈저 성(Windsor Castle)에 전시되어 있다.

     

     

     

      

     

    Charles James Napier

    General Sir Charles James Napier, GCB (10 August 1782 – 29 August 1853), was a general of the British Empire and the British Army's Commander-in-Chief in India, notable for conquering the Sindh Province in what is now Pakistan.

    He was the eldest son of Colonel (the Honourable) George Napier and his second wife, Lady Sarah Lennox, with this being the second marriage for both parties. Lady Sarah was the great-granddaughter of King Charles II. Napier was born at the Whitehall Palace in London, and he received part of his education at boarding school in Celbridge, Ireland. Napier joined the 33rd Infantry Regiment of the British Army in 1794, and decided to become a career soldier.

    Napier commanded the 50th (Queen's Own) Regiment of Foot during Peninsular War in Iberia against Napoleon Bonaparte. Napier's activities there ended during the Battle of Corunna, in which he was wounded and left for dead on the battlefield. Napier was rescued, barely alive, by a French Army drummer named Guibert, and taken as a prisoner-of-war. Nevertheless, Napier was awarded an Army Gold Medal after he was returned to British hands.

    Napier recuperated from his wounds while he was being held near the headquarters of the French Marshall Soult, and then somehow he was returned to the British Army.

    Napier volunteered to return to the Iberian Peninsula in 1810 to fight again against Napoleon in Portugal - notably in the Battle of the Côa, where he had two horses shot out from under him, in the Battle of Bussaco, in the Battle of Fuentes de onoro, and in the Battle of Badajoz (1812) (the second siege of Badajoz) in Castile, Spain, in which he was a lieutenant colonel in the 102nd regiment. For his deeds at Bussaco and at Fuentes de Oñoro, Napier won the silver medal with two clasps.

    In 1838, Napier returned to England to become the General Officer Commanding of the British Northern District.

    A statue in honour of Sir Charles Napier by George Gamon Adams (1821–1898) is on the southwest plinth, of the four plinths in Trafalgar Square, London.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승리(1805)를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 광장에는 높이 56m의 넬슨 기둥(1840~43)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기둥에는 E. H. 베일리가 제작한 높이 5m의 넬슨 제독 동상이 있다. 넬슨 기둥의 주초 모서리에는 에드윈 랜드시어 경이 조각한 4마리의 사자가 버티고 있다. 이 광장은 1820~1840년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현재 국립미술관과 세인트마틴인더필즈 교회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각종 정치집회가 열렸으며, 매년 12월 밤이면 사람들이 밤에 이곳에 모여 캐럴을 부르고 노르웨이에서 가져온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하는 전통이 있다.

     

     

     

      

     

      

     

      

     


    트라팔가광장 주변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구경만 좀 했다. 물건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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