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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겉핥기 유럽 일부 여행-그 십사(피렌체)나의 여행기 2009. 12. 13. 00:23
수박 겉핥기 유럽 일부 여행-그 십사(피렌체)
수박 겉핥기 유럽 일부 여행-그 십사(피렌체)
8일째
일찍 일어났다. 일주일 정도 되었지만피곤하지 않다.밖을 나가니 안개낀 아침이다. 뿌옇다.
올리브나무다.
호텔앞에는 올리브 밭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지방의 많은 사람들은 올리브가 음식의 기본이라 할만하다.
재배도 많이 하지만 역사도 깊고 조리법도 다양하다. 이 호텔도 올리브 밭인데 잘라내고 호텔을 지은 듯하다. 주변은
다 올리브밭이다. 호텔앞 올리브 나무는 이미 수확이 끝난 듯. 마침 열매가 있어 찍었다.
[올리브]
[용담목 물푸레나무과의 상록교목. 높이 약 10m. 잎은 마주나며 가늘고 긴 타원형으로 질이 단단하고 가장
자리가 밋밋하다. 표면은 암녹색이고 뒷면은 짧은 털이 빽빽이 나며 은백색이다. 초여름에 잎겨드랑이에서
꽃자루가 나오고 황백색의 작은 종모양의 꽃이 핀다. 꽃부리의 끝이 4갈래로 갈라지므로 언뜻 보면 꽃잎이 4
장인 것처럼 보인다. 수술은 2개이다. 열매는 넓은타원형으로 긴지름 2∼3㎝이며, 가을 무렵까지는 황록색이
고 겨울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속에 1개의 종자가 있다. 올리브나무에는 많은 품종이 있고, 품종에 따라서 맛
이나 기름의 함유량이 다르므로 염장용(鹽藏用)·채유용 등 용도가 정해져 있다. 번식은 대개 접붙이기나 꺾꽂
이로 한다. 대목(臺木)은 실생대목을 사용하고, 4월 상순부터 중순에 깎기접, 또는 봄·가을 두 계절에 눈접을
한다. 꺾꽂이는 길이 30㎝ 정도의 가지를 3월에 맨땅에 꽂는다. 연내에 새순이 뻗어나오고 이듬해 뿌리가 나
온다. 원산지는 소아시아로 되어 있으나, 리비아와 사하라사막이 원래의 원산지로서, 이집트와 크레타섬을
거쳐 그리스로 들어간 다음 소아시아로 들어갔다고 보는 설도 있다. 세계적으로는 그리스·이탈리아·에스파냐
·프랑스·터키 등 지중해연안의 여러 나라가 주요 산지이다.
이용
열매는 가공용과 채유용으로 크게 나눈다. 세빌라노와 만자뇨는 피클스용, 루카와 네바조브란코는 채유용,
미숑은 겸용품종이다. 가공제품에는 녹과(綠果)염장, 종자를 빼고 피망 등을 채운 충전(充塡)염장, 숙과염장,
그리스풍 올리브, 말린 올리브 등이 있다. 열매에는 고미(苦味)글리코시드인 오률로페인이 있어서 떫다. 이것
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수산화나트륨의 1.5∼2.0% 수용액에 6∼10시간 담가 두는 것이 좋다. 처리 후에는 물
로 충분하게 씻어서 수산화나트륨을 제거한다. 기름은 숙과(熟果)의 과육에서 올리브유, 핵과에서는 올리브
핵유가 채취되며, 샐러드유·약용·윤활유·비누 등에 사용한다. 재목은 치밀하여 조각에 쓰인다.
문화사
올리브나무는 유사 이전부터 재배되어, 고대 이집트왕조의 미라의 관에서도 그 가지나 잎이 출토되었다. 대
표적인 성서식물(聖書植物)로서 고대 헤브라이인의 중요한 식물 중의 하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식용 외에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 등유(燈油)나 깨끗하게 하는 기름 등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서》 <창세기> 8장
노아의 방주에서는 방면한 비둘기가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물고 되돌아 온 것을 보고, 노아는 신의 진노가 그
쳐 물이 빠지고 다시 대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이래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
는 평화의 상징이 되어 유엔기(UN旗)의 디자인에 올리브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다. 또한 올리브나무는 그리
스의 국수(國樹)로 되었고 크레타문명의 벽화에도 묘사되어 있으며, 신화에서는 여신 아테네에 의해서 생겨
났다고 한다.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은 자유·희망·자비·순결·질서의 상징으로서 올리브나무의 식림(植林)을 입
법화하였고, 시민의 뜰에 올리브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열매는 소금절임하여 식용으로 보존되었고, 기름
은 머리털이나 피부에 발라 그 향기로 체취를 없애는 등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특히 기름은
중요한 무역상품으로, 아테네의 경제를 윤택하게 했다. 고대 로마에는 BC 7세기 무렵에 전해져서 여신 미네
르바(아테네와 동일시된다)의 상징이 되었다.]이 때 호텔 여직원이 출근한다.
낯이 익다. 현대차다. 이탈리아 와서도 잘 달린다. 반갑다.
싸서 ? 디자인이? 품질이 ? 글쎄다. 다겠지.오늘 일정도 바쁘다. 언제나 그랬지만
로마에서 다시 북부로
A1 안개낀 고속도로다. 포도밭도 보인다.
한시간여를 달려 휴게소에 들른다.
화단에는 자주 보아왔던 꽃들도 보인다.
큰 광고가 보인다.
IT`S COOL SOUL 기아차 광고다. 반갑다. 많이 팔리기를 기원
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테지.
휴게소에서 10여종의 꽃을 보았다. 아직도 꽃을 우리나라에서
보던 꽃을 밖에서 보았을 때도 외국에 나가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이 반갑다.송엽국인가?? 해당화인가?? 자주개자리인가? 억새? 산조풀? 모르겠네 사위질빵인가?할미밀망인가? 당아욱인가? 20여분 휴게소에, 다시출발
시내 진입 도로 가운데 큰 나무가 좋아보인다. 여기도 주차난으로 몸살이다.과속방지용 요철도 보이고
공동묘지라 생각되는 것도 시내에 있고
주차할 곳을 찾아 ......
내렸다. 출발한지 3시간이다.
로마를 돌아다닐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특히 건물양식에서 말이다.
고대도시들은 다 그렇듯 길이 좁다. 단층 건물은 별로 없고 2-4층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쪽으로 한쪽으로 벽이 없는
회랑식의 건물이 많다. 아치형의 창문이 많이 보인다.[1563년 설립된 유럽 최초의 미술 학원-Academy of the Arts of Drawing]
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
The 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 ("Academy of the Arts of Drawing") of Florence promotes the safeguard of the works of art in Italy. Founded in 1563, it was the first academy of drawing established in Europe.
History of the Accademia
Founded by
, on 13 January 1563, under the influence of the architect
,[1] it had been initially denominated Accademia e Compagnia delle Arti del Disegno—Academy and Company for the Arts of Drawing—as it was divided into two different operative branches.While the Company was a kind of corporation which every working artist in Tuscan should join, the Academy was constituted only by the most eminent artistic personalities of Cosimo’s court, and had the task of supervising the whole artistic production of the medicean state.The extraordinary contribution of academics a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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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increased the prestige of this institution, certainly not reduced to the politic and economic limits of the medicean principality. The first woman honoured with the admission in the academy was
.The granduca
, in 1784, subtracted all kind of professional artistic responsibility from the Company, conferring this task to the just founded
. The Academics College of the prestigious medicean institution conserved the task of artistic formation and supervision of artistic production of the
.The headquarters of the academy nowadays is
. The institution is divided in six classes: Painting Class, sculpture class, Architecture Class, History of Art Class, humanistic Disciplines and Sciences Class. The Academics are divided in Emerita, Ordinaries and Correspondents.
[루이지 케루비니 국립음악원][루이지 케루비니 국립음악원-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는
의
및 종교 음악
작곡가이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뒤·
에 초빙되었고, 1788년 28세 때
에 정주했으며 프랑스인의 취미
에 맞는 화려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인기를 모았다. 1795년 파리에 창설된 파리 음악원의 감독에 취임했고, 그 뒤 한
동안의 음악감독으로도 있었으나 나폴레옹과 의견이 맞지 않아 퇴직하였다. 1822년 파리 음악
원 원장이 되었다. 천재소년의 입학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841년 노령 때문에 원장직을 사임,
그 동안이나
을 방문하여 자기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은 오페라 <메디아>(1797)와 <물긷기>
(1800)로은 케루비니의 오페라를 높이 평가했고 성악의 취급에 관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예로부터 이곳은 전문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들이 있었다. 지금과는 의미상 다르지만 전문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기와 예를 습득하는 그런식이다. 철저히 능력을 길러그 능력에 또 다른감의 창의성을 가미했다.
근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음악과 조각을 배우기 위해 공부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건물이 높지도 크지도 않다.[피렌체 대성당]
[피렌체 대성당은의
에 있는
(
)이다. 정식 명칭은 ‘꽃의
’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피렌체 대성당은 이전에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고(피렌체 시민들은 이 성당을 재건축 이후에도간혹 이전의 이름으로 불렀음),피사와 시에나에 새로 지어진 성당들에 자극을 받아 건설되었다. 13세기 말, 당시의 상황을 신간 연대기(Nuova Cronica)에 저술한 조반니 빌라니(1276~1348)에 따르면 이미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점점 붕괴하고 있었다.게다가 인구가 급증하던 이 시기의 피렌체에 비해 성당은 너무 작았다. 점점 번영하던 피렌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 새로운 성당은
가 1296년에 (설계안은 여러 번 바뀌고 나중에는 규모가 작아지기는 했지만) 설계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과
의 건축가였다. 그는 세 개의 넓은 중랑(中廊)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했으며, 가운데 중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했다. 피렌체에 파견된 첫 교황 사절이었던 발레리아나 추기경에 의해
첫 공사에 들어갔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70여 년간 계속되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했다.아르놀포가 1302년에 사망하자 대성당의 공사는 30년간 미루어졌다. 1330년
의 성유물이 발견되면서 공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 양모 상인 길드)가 이 공사의 독점적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에는
가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의 조력으로 조토는 캄비오의 설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조토의 주요 성과는 종탑 건물을 만든 것이다. 조토가 1337년 죽고 나서도 안드레아 피사노는 계속 건물을 만들었으나, 1348년
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1349년 대성당 공사가 재개되어
는 종탑을 완성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후진(後陣)과 측면 경당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 그 밖에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등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1375년에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헐렸다. 네이브는 1380년 완성되었고, 1418년 오직 돔만이 미완성 상태였다.실외벽은 수직과 수평으로 교대하는 여러 색의 대리석 배열로 되어 있는데 카라라(하얀색), 프라토(초록색), 시에나(붉은색), 라벤차 등 기타 다른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대리석 배열은 이미 존재한 인접한
과 조토의 종탑의 벽에 있는 배열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측면에는 카노니치(Canonici)의 문(남쪽)과 만도를라(Mandorla)의 문, 이 두 문이 있다. 이 문들은
,
,
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섬세한 트레이서리(고딕식 건축에 창에 붙이는 장식 격자)와 장식이 있는 여섯 개의 측면 창은 필라스터(벽체에서 돌출한 기둥)들로 나뉘어 있다. 익랑(翼廊)에서 가까운 네 개의 창문만이 빛을 받아들이고, 두개의 다른 창문은 단지 장식일 뿐이다. 클리어스토리 창(고측창, 높은 곳에서 빛을 받아 들이는 창)은 둥근 모양으로 이탈리아 고딕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대성당의 바닥은 16세기에 대리석 타일로 만들어졌다.피렌체 의회의 소재지였던 이 대성당은
가 설교하였고,
가
에 살해당하기도 하였다(함께 있던
는 겨우 목숨을 건졌음).
[피렌체를 배경으로 냉정과 열정사이] 나카에 이사무 감독
조토의 종탑(이탈리아어: Campanile di Giotto)조토의 종탑(이탈리아어: Campanile di Giotto)은
에 있는
이다.
가 설계하였다.
제작을 시작하여 조토가 죽은 후 제자
와
가
에 완성했다. 높이는 약 85m이다.
산 지오반니 세례당 / Battistero di San Giovanni (피렌체 세례당)
피렌체 세례당(Florence Baptistery)는
에 있는
이다.
두오모 옆에 위치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팔각형 건물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이다. 내부 장식은
가 맡았다.세례당 자체보다 부조가 새겨진
3개의 청동문이 더 유명합니다. 특히 동쪽 출입문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답다고 극찬했다고 전해집니다. 심판자 그리스도의 모습, 천체도,
성서 에피소드 등이 그려진 천장의 모자이크도 볼거리입니다.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복제품]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로렌초
의 작품(1425~52).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의 산조반니 세례당 동쪽 입구에 제작한 청동문이다. 문에는 각각 벽감 속의 작은 형상들과 흉상이 들어 있는 원형 장식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했고 그 사이에 〈구약성서〉의 여러 장면들이 새겨진 5개의 직4각형 부조가 들어 있다. 문은 전면적으로 도금되어 있다. 부조 속의 인물들은 고전적 형태를 보이며, 부조에 입체감을 더하기 위해 배경으로 풍경이나 원근법적으로 묘사된 건축물들이 새겨져 있다.이 문에 새겨진 10개의 부조는 르네상스 초기의 조각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이 작품은 15세기초 피렌체에서 꽃핀 선원근법과 고전적 양식에 통달한 조각가의 재능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배경의 건물과 풍경에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회화적 구성과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냈고, 조각을 회화화하였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없다."라고 말한 이후 이렇게 불리워졌습니다.
피렌체 대성당, 지오토의 종탑등과 함께 피렌체를 빛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속해 있습니다.
현재 천국의 문의 진품은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세례 성당에 놓인 것은 복제품이지만 진품의 세밀함과 예술성을 거의 완벽하게 되살렸다고 평가됩니다.
천국의 문은 다시 열리기까지 무려 34년이라 걸렸습니다.
'아트 데일리'에 따르면 복원기간이 길어진데에는 사전 조사만 12년이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전 조사는 1978년에 시작되었는데 1990년 4월에야 세례당에 있던 작품을 들어내어 실험실로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존 전문가는 10개의 판을 분리하고 되돌려 놓는 작업은 계획부터 실행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고 털어놓았으며, 그 이후 본격적인 보존 작업 역시 22년이 소요되어 34년만에 천국의 문이 복원된 것입니다.
원래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에 장식되어 있었지만 복원이 마무리되면 오는 9월 8일부터 피렌체 대성당의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입니다.
습도가 너무 높아서 공기중 염분에 의해 부식되었던 천국의 문은 앞으로 습도를 20%로 유지해 주는 커다란 유리상자에 넣어 보호할 것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확장공사가 끝나는 2014년이나 2015년 즈음에는 천국의 문이 새 공간으로 옮겨져 360도 감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니 기대해 볼만 합니다.[출처 : 이탈리아 관광청]짧은 시간에 이 거대한 성당을 세세히 볼 수는 없는 것. 자세히 보기 보다는 사진을 찍는 것이 더 급하다.
로마에서 본 성당하고는 차이가 많다. 우선 드 꾸밈과 재료다. 대리석 자체가 다르다. 색이 있는 대리석으로 교체 사용했으며 반
복되었다. 직선이 유난히 많이 사용되었다. 피렌체 대성당 전면은 성모 마리아를 위주로 꾸며진것 같다. 대성당의 중앙문과 성당
앞 세례당의 청동문은 그 공예솜씨가 탁월하다. 부근에는 공방도 있다. 오랜 전통으로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테의집으로 이동했다. 우리하고 삶의 방식이다르다. 일반 집도 성 같다. 얼마나 싸움하며 살아갔기에 성루 같은 것이 "ㅁ"자형
으로 밖과 구분.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그런 구조가 아닌가?
[단테가 다녔다는 교회]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단테)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경 ~
또는
)는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로 널리 알려진
의
이다.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단테의 아들 야코포의 설명: “Durante olim vocatus Dante, condam Alagherii de Florentia”).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시뇨리아 광장]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은
에 있는
이다.
과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장 곳곳에는 피렌체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동상들이 서 있다.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유서깊은 정부 청사.
14세기에는 피렌체 공화국 가 열리는 장소였고 이후 메디치 가문 출신의 토스카나 대공 정부가 자리를 잡았다. 1865~71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하원이 자리잡았고 1872년부터 시청 건물이 되었다.베키오 궁전의 토스카나 고딕식 설계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했다고 전해진다. 1298~1314년에 세워졌으며, 16세기말 조르조 바사리와 부온탈렌티에 의해 개축되어 구조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고 실내장식도 대부분 다시 이루어졌다. 피아차델라시뇨리아와 마주보고 있는 궁전의 테라스에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걸작품들, 특히 도나텔로의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Judith and Holofernes〉(1456~57),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David〉의 복제품(원래 이곳에 있던 진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지금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음), 바초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코스 Hercules and Cacus〉(1534)가 있다.[코시모 데 메디치] 청동기마상잠볼로냐(1529-1608)작메디치 가문을 연 조반니 디 비치의 아들 1537-1574년 재위한 토스카나의 첫 대공
Vacca's lion. Medici Lion by
at the
Loggia dei Lanzi
로자 데치 란치(Loggia dei Lanzi)는
에 있는 화랑으로, 15개의 조각상이 들어서 있다.
's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넵튠 분수[Fountain of Neptune]
's statue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s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A reproduction of
's statue David -- The original is housed in the
Accademia di Belle Arti Firenze
's
Menelaus supporting the body of Patroclus
,a much-restored Roman sculpture
산타크로체 [Santa Croce]
이 교회에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미켈란젤로, 비토리오 알피에리, 레오나르도 브루니, 조아키노 로시니, 갈릴레오 등 많은 이탈리아 유명인사들의 묘지가 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물 가운데 아름답다고 이름난, 브루넬레스키가 지은 파치 예배당은 14세기에 지은 수녀원 안에 있다.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변 건물의 낙서는 우리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다시 버스를 타고 피렌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 아르노 강가를 따라 가다가 다리를 건넌다.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피렌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아름다운 정경이다.
시뇨리아광장의 복제품 다비드
미켈란젤로 언덕의 복제품 다비드
이곳 언덕에는 커다란 동상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복제되어서 이곳 광장에.
2시간여를 달려 이곳으로
다시 한 시간 반 달려 몬디알 호텔로
이곳에서 하루를 마지막으로
내일위해 하루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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