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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문화재 이야기 2021. 3. 3. 16:08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사자루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개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적 제5호

    부여 부소산성 (扶餘 扶蘇山城)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문호재청 홈페이지에서 사자루를 검색하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사자루 

    사비루를 검색하면 사적 제5호 부여 부소산성 (扶餘 扶蘇山城)

    이 검색된다.

     

    泗(내 이름 사)泚(강 이름 비)樓(다락 루) 泗(내 이름 사)沘비(강 이름 비)樓(다락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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