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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남리 오층석탑인가? 석목리 오층석탑이 옳은 듯 한데......나의 문화재 이야기 2021. 3. 2. 11:22
동남리석탑 (東南里石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1084.05.17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석목리 논절부락의 고려시대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고 있는데,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있고, 탑신의 4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탑신의 1층 몸돌을 괴어주는 부분 주위로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2층 몸돌부터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는 희미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돌을 짜놓은 수법이 소박하고 다듬은 솜씨가 서투르나, 고려시대 후기 당시의 석탑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양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동남리석탑 (東南里石塔) | 국가문화유산포탈 | 우리지역 문화재 (heritage.go.kr)
부여석목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扶餘石木里石造毘盧蔗那佛坐像)-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호-1973.12.26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옛 절터에 모셔졌던 주존불(主尊佛)로서,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부처의 얼굴이 눈병에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얼굴이 많이 손상되었다.
머리 위에는 넓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으며, 둥글고 풍만한 얼굴은 손상되어 세부기법은 알 수 없다. 양 손은 가슴에 모아 오른손이 왼손 검지를 감싸고 있는데, 손과 발의 세부수법이 형식화 되었다.
옷은 몸에 밀착되어 간략한 옷주름으로 표현하여 무릎 앞에까지 덮여 있는데, 옷주름이 섬세하지 못하다. 불상이 모셔진 대좌(臺座)는 원래의 것이 아닌데, 탑의 옥개석(屋蓋石)을 하대석으로 사용하였고, 안상(眼象)이 조각된 중대석, 겹잎 연꽃무늬가 새겨진 상대석이 갖춰져 있다.
비록 마멸이 심하나 당시의 엄숙한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불상으로 함께 전해오던 석탑 1기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위 두 문화재는 같은 곳(석목리)에서 옮겨 왔으나 하나는 부여석목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扶餘石木里石造毘盧蔗那佛坐像) 또 다른 하나는 동남리석탑 (東南里石塔)이다.
동남리석탑 (東南里石塔)아니라 석목리 석탑(石木里 石塔)아 아닌가?
동남리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대에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산리, 마천리, 신대리, 남산리, 학서리 일부와 대방면의 탑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산과 남산의 이름을 따서 동남리라 하였고, 부여군에 편입되었다가 그 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동남리에서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동남리가 되었다.
1948년 동산(東山), 마천(馬川)으로 구분되었다가 1980년 동남 1, 2, 3, 4, 5로 분리되었고 1990년 동남 6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 면적은 1.67㎢이며 2,420가구에 인구는 7,788명이다.
동남리는 동남 2리 전 지역이 상가지역이며 그밖은 거의 주거지역으로 되었고 고적으로는 백제 때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 궁남지 등이 있으며 부여군청 등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뜸별로는 백제의 마동왕자(무왕)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이곳에 살다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로 마래마을, 부장대가 있었다고 부장골, 향교가 있어서 향교골이 있다.마을유래 > 우리읍소개 > 부여군 부여읍 (buyeo.go.kr)
석목리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큰 마을이 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불교의 요람지였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마을은 차츰 쇠퇴해갔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다시 마을이 살아나 정리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는 진목리, 용전리, 석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교와 진목의 이름을 따서 석목리라 하였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석목리가 되었고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부여읍 석목리가 되었다.
면적은 1.18㎢에 가구수는 213호이며 인구는 675명이다.
석목리는 백제시대의 나성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페허가 되었다가 조선중기 1600년경부터 함열남궁씨와 동래정씨가 입촌하였다.
본 마을은 석교리와 진목리를 병합하여 석목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안에 노은사란 절이 있어 이의 준말로 논절이라는 이름도 붙여진 듯하다.
쌍북로타리에서 논산 공주방면 국도 안에 있는 곳을 ‘만괭이들’이라 하는데, 이는 백제가 망할 때 의자왕이 웅진(熊津)으로 피난함에 만광이란 복술가가 왕의 행방을 알려줌으로써 백제인들이 만광이를 죽이고 그 집터에 연못을 파니 이곳이 만광지(萬光池)로 만괭이 방죽이라 하였으며, 가탑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괭이고개라 부른다.
노은사지(老隱寺址)에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이 불상이 안질에 효험이 있다는 속된 말이 전해 내려와 옛날에는 안질이 나면 불상 앞에 달려가 부처의 얼굴을 긁어다 안약대신 사용했다 하며, 이로 말미암아 안면 부분의 손상이 매우 심한 상태다.
1979년에 새마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32동의 주택을 신축 입주하여 취락구조뜸이 형성되었고, 90년대 초에 농산물 공판장 설립과 함께 주변에 무지개 빌라가 들어서 도시근교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마을유래 > 우리읍소개 > 부여군 부여읍 (buyeo.go.kr)
동남리가 석목리를 포함하는가?
같은 부여읍에 속하지만 동남리가 석목리를 포함하지 않는다.
동남리
석목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동사리석탑 (東寺里石塔)도 국립부여박물관에 있지만 동남리 석탑이라 하지 않았다.
부여 노은사지 오층석탑
[ 扶餘老隱寺址五層石塔 ]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石木里) 논절부락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석탑으로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고려시대 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목리 논절부락에 있는 부여 노은사지(扶餘老隱寺址)에서 발견된 것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기단(基壇)은 이중기단으로 하대저석(下臺底石)은 없어지고 하대중석(下臺中石)과 하대갑석(下臺甲石), 상대중석(上臺中石)과 상대갑석(上臺甲石)만 남아 있다. 하대중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네 모서리에 희미하게 귀기둥을 각출하였다. 하대갑석의 위쪽 면에는 1단은 높고 2단은 아주 얕게 각출된 2단의 상대중석받침이 있다. 상대중석은 4장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부가 결실되었고 아무런 장식이 없다. 상대갑석은 2단의 탑신받침을 각출하였는데, 1단의 가장자리에는 복련(伏蓮:꽃잎이 밑을 향한 연꽃무늬)이 양각되어 있다.
4층의 탑신만 없어진 상태로 나머지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만들었다. 3층의 것은 2개로 깨진 상태이고 5층은 노반(露盤)과 1개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귀기둥이 표현되어 있는데 2·3층의 것은 마모되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4층까지 남아 있으며 3단의 옥개받침을 갖추고 있다.
돌을 짜놓은 수법이 소박하고 다듬은 솜씨가 다소 서투르지만 고려시대 후기 당시의 석탑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양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참조항목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노은사지 오층석탑 [扶餘老隱寺址五層石塔] (두산백과)
석목리 석탑이 아니고 노은사지 오층석탑이라고 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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