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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문화재/내가 본 국보 2013. 8. 8. 23:43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종목
국보 제8호
명칭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 시대
통일신라 소유.관리
국유,부여군 설명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7대 손 범청(範淸)의 아들 법명은 무염(無染) 낭혜화상 801(애장왕 2)∼888(진성여왕 2). 신라 후기의 승려.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 법명은 무염(無染). 범청(範淸)의 아들로 어머니는 화(華)씨이다. 제29대 태종무열왕의 8대 손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또한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므로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공주 성주사(聖住寺)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1293년(충렬왕 19) 천책(天?)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그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논에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佛敎)와 선종 조사들의 도인 조도(祖道)를 구별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분은 그에 의해서 처음 도입되었다.또한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하는 것이 조도라고 정의하였고, 청정이나 부정 등의 상대적인 구별을 넘어선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말을 빌려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불교는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쓴 부처의 방편이라고 보았다.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光)이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이 쓴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현재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에 있다.'문화재 > 내가 본 국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