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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가계 여행기-5 십리화랑,금편계곡
    나의 여행기 2011. 1. 16. 16:11

    장가계 여행기-5


    관광 2일째다.
    아직도 장가계가 어디고 원가계는 어딘지 구별도 못하면서
    멋진 풍광 그리며 어제와 같은 차,같은 운전수,같은 안내양,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차에 올랐다.
    5분도 안돼 다왔단다.
    묵었던 호텔에서 아주 가깝다.
    햇살은 벌써 따갑고 관광객은 수백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국가삼림공원이 정식 명칭이다. 정식 문은 지금 공사중이고
    임시로 입장객을 들여보내는 문이다.

     

     

     

     

     

    <공사중인 정문>
     
     
    <커다란 간판-원가계라는 한글이 우리 눈을 의심케 했다>

     
     

     
    문안은 꽤 넓은 주차장이 있고 같은 색깔의 중형 버스와 그 보다 좀 더작은 차들이 순서대로 들어와 관광객을
    싣고 가파른 지그재그 고갯길을 오른다.
    한참을 기다려 지문인식기에 엄지를 넣어 지문을 맡기고 우리는 그 중형 버스에 올랐다.
    지그재그로 아슬아슬하게 교행하면서 올라간다.
    여기도 어제 본 보봉호와 마찬가지로 협곡을 막아 호수로 만들고 호수가 생기다 보니 길은 쌩으로 내야 했다.
     바위를 깍고 뚫어서 겨우 길을 만들고 그길로 수많은 관광객을 나른다.
    20분 정도 가더니 내리란다. 쫓아 다니기가 바쁘다.
    여기가 십리화랑이란다.

     

     

     

     

     

     

    <십리화랑 입구>

     
     
     
     
     
     
     
     
     
     
     
     
     
     
    계곡이다. 가운데는 개울이 있고 개울 건너편에는 기백미터되는 병풍같은 암석 산이다. 모노레일은 개울 오른쪽에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간단다. 4킬로미터가 넘기에 걸어서 갔다오려면 두어시간 더 걸리기에 다음 일정도 있고 우리는 모노레일에 올랐다.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신 설명을 하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왼쪽에 기암괴석이 병풍같이 죽 이어진다. 오른쪽에 앉은 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왼쪽에 앉아야 잘 보이는데 . 내려올 때는 오른쪽에 앉아야지. 가끔 오른쪽을 보면 들꽃들이 보이는데 흔들리는 차라 촬영은 어렵다. 하기야 목적은 관광이니 참아야지.
    시간이 넉넉하다면 걸어서 다녀오면 들꽃도 찍고 경관도 구경하고 좋을 듯 싶었다.20분동안 가는데 끝까지 기암과 거석으로 이루어진 돌봉우리들이다. 그 풍광이 아름답다. 10리에 걸쳐 좋은 그림들이 펼쳐저 있는 화랑같다.

     
     
     

     

     

    <십리에 걸쳐 이렇게>

     
     
     
     

     

    <십리화랑에서 본 들꽃들> 
    중국관광객들은 걸어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울과 산에는 억새가 많았다.
    내려서 10-20분 시간을 준다. 기념사진도 찍고 단체사진도 찍고 잠시 쉬었다.
    시원했다. 그러나 옷은 이미 다 젖었다.

     

     

     

     


    다시 타고 내려와 셔틀 버스로 옮겨타고 다음 코스로 갔다. 20분쯤 갔을까 . 금편계곡이란다.
    길은 두 갈래 오른쪽은 백룡엘리베이터 타러 가는 계곡이고 왼쪽은 금편계곡이다.
    가운데에는 장쩌민이 다녀갔다 해서 비석을 세워 두었는데 그 비석을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천히 계곡으로 들어섰다. 폭이 20-30미터나 될까. 계곡 보다는 협곡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양쪽으로 높은 암벽이다. 대부분 직벽이다

     

     

     

     

     

     

     

     

     

     

     

     

    <금편계곡에서 본 들꽃들> 
    꽃보랴 풍경 구경하랴 나는 바빴다. 걸어 쫓아가야 하기에 , 카메라 바꾸어가며 찍어야 하기에, 최소한 멈추어서야 하기에........
    들꽃을 보면 찍는다 놓칠 수 없다. 찍으면 뛰어야 한다.이곳에는 비교적 꽃이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과
    같은 종류도 꽤 보인다. 외길이니 망정이지 갈래길이라도 나타나면
    분명 이국땅에서 마누라 잃겠다 싶었다.
    다음 일정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이런 협곡도 처음이다.
    안내양이 기다리고 있다가 한국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음료를 사주었다. 막걸리다. 야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다니. 한글간판의 한국식당이 있다니.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갔던 길로 되돌아 나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었던 발해관>
     
     
     
     
     
     
     
     
     
     
    장가계국가삼림공원앞 <발해관 주변 모습> 
     

     

     

      <마을주변에서 본 꽃들>

     

    노인을 공경하여 도(道)를 얻은 장량(張良)

     

    장량(張良)의 자는 자방(子房)이고,한(漢)나라 개국공신으로 유후(留侯)로 봉하고, 대사도(大司徒)라는 관직을 받았다.


    장량이 어린 시절, 강소성(江蘇省) 하비현(下邳縣)의 이교(圯橋)를 지나가는데 마침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머리에 검은 두건을 동여매고 황색 옷을 입은 노인 한 분을 만났는데, 신발을 다리 밑에 떨어뜨렸다. 노인이 장량을 보고 “얘야, 신발을 나에게 좀 주어다 주렴” 하고 부탁하였다. 장량은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바로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찾아 두 손으로 드렸다. 노인이 다리를 펴서 신발을 신으려 하자 장량은 공손하게 신발을 신겨 드렸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가르칠 만하구나! 내일 아침에 여기로 오너라. 내가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날이 거의 밝을 무렵에 장량은 약속한 대로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노인은 벌써 그곳에 와 있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우리는 약속을 하였는데 너는 나보다 늦게 도착하였으니 너에게 도(道)를 전해 줄 수가 없다”라고 했다. 이날 후로 장량은 세 번이나 약속장소로 나갔다. 세 번째 돼서야 장량은 겨우 노인보다 먼저 도착하였는데, 조금도 지겨워하는 기색이 없자 노인은 흐뭇해하며 그에게 책 한 권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 책을 잘 읽으면 앞으로 제왕의 군사가 될 것이다. 만약 나에게 다시 가르침을 받으려면, 산동성(山東省) 곡성(穀城)의 산 아래로 가거라. 거기에 황석(黃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장량은 이 책으로 공부를 한 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평정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책을 ‘황석공서(黃石公書)’라고 불렀다. 이 책으로 몸과 마음을 닦는 기공(氣功)을 수련하면, 벽곡(辟穀)1)하여 단식(斷食)할 수 있으며, 몸이 가벼워지고, 득도(得道)하여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장량이 시해(屍解)2)하여 세상을 떠난 후, 합서성(陜西省) 장안(長安)의 용수원(龍首原)에 매장되었다. 서한(西漢) 말년에 적미지난(赤眉之亂)때, 농민들이 적미군(赤眉軍)을 조직하여 곳곳에 관원과 군인들을 붙잡아 살해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장량의 묘를 발굴하여 보니 황석베개(黃石枕)만 보이고 장량의 시신과 옷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돌베개가 마치 유성(流星)처럼 허공으로 날더니 사라졌다고 한다.


    장량이 신선세계에서, 태현동자(太玄童子)가 되어 태상노군(太上老君: 도가(道家)의 시조인 노자(老子)의 존칭)을 모시면서 선경에서 노닐었다. 장량의 8대손 장도릉(張道陵)도 출가해서 도를 닦았는데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학명산(鶴鳴山)에서 백일비승(白日飛昇)3)하여, 곤륜산(崑崙山) 서왕모(西王母)를 알현하러 갔을 때, 장량도 그 성회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선전습유(仙傳拾遺)》)

     

    1) 벽곡(辟穀): 벽곡은 단곡(斷穀)이라고도 하여 모든 곡물(穀物)을 먹지 않고 초근목피(草根木皮)만 먹는 것으로서, 사람은 그 정신이 육체에 속박되어 있으며 육체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보전되기 때문에 절식(節食)하면서 화식(火食)을 끊으면 정신도 자유로워져서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수련계에서 말하는 진정한 벽곡은 물과 음식이 없는 절벽의 동굴 같은 곳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수련하는 것을 진짜 벽곡(辟穀)이라고 한다. 수련성취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어야만 했다.


    2) 시해(屍解): 도가의 수련 성취하는 원만형식(圓滿形式)으로, 수련하여 득도한 후, 본인의 짚신이나 지팡이 등의 물건(物件)하나로 가짜 시신(屍身)을 만들어 장례를 치르게 하고, 본인 (本人)은 신선(神仙)이 되어 진짜로 죽지 않는다고 한다.


    3) 백일비승(白日飛升): 대낮에 육신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 도가(道家)에서 득도하여 진인(真人)으로 수련 성취 되면 자신의 육신을 도체(道體)로 수련하여, 그 도체를 가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수련하여 전신(傳神)의 맥(脈)이 열리면 뜰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본래의 능력이라고 예부터 수련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著者: 李毓秀 번역: 素 江

    http://www.epochtimes.co.kr/news/view.html?section=165&category=167&no=121005

     

    <태공병법(太公兵法)>

    장량(張良)은 소하(蕭何), 한신(韓信), 진평(陣平)과 "한초4걸(漢初四傑)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史記·留侯世家」,「漢書·張陳王周傳」등의 기록에 의하면 장량이 진섭(陳涉)에서 기병한 후, 소년 100여인을 모아 패공(沛公) 유방(劉邦)에게 보내고, "장량이 패공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자주 설하니, 패공이 기뻐해 그 계책을 자주 채용했다" 유방이 칭제(稱帝)한 이후, 막후( 幄)에서 계책을 모사해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덕으로 유후(留侯)로 봉했다.

     

    http://cafe.daum.net/gangsanhai/N5zY/151?docid=716381278&q=%C0%E5%B7%AE%B9%A6&re=1

     

    장가계(張家界)란 지명은 장량(張良)으로부터 왔다.

     

    중국 호남성 서북쪽 한 구석에 위치한 장가계(張家界)는 3억8,000만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해발 1,500m의 고원지대가 만들어졌는데 장구한 세월에 걸쳐 퇴적암(堆積岩) 중 역암(礫岩), 사암(沙岩), 석회암(石灰岩) 등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고 단단한 이암(泥岩) 부분만 남아서 78,000개의 각가지 물형석(物形石)과 기암봉(奇岩峰)들을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곳을 신선들이 산다는 낙원(파라다이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불렀고, 지금은 다른 곳에 도원(挑園)이 따로 있다 하여 무릉원(武陵源)이라 부른다고 한다.

    바로 이 곳에 한고조 삼걸의 한 사람 장량의 묘가 있다.
    원앙(鴛鴦)계곡 입구, 그러니까 백룡전제(百龍電梯: 높이 335m의 세계제일의 엘리베이트)에서 가깝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장량은 한고조가 중국 천하를 통일한 다음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자기에게 주는 삼만호 봉토도 사양하고 병을 핑계하여 은퇴한 후에 바로 이 곳에 와서 신선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토가족(土家族: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이 곳에서는 지금도 장가계시 인구 150만의 66%인 98만명)의 거부반응 이 거세었으나
    장량은 수차(水車)를 고안하여 그들의 농사에 큰 보탬을 주는 등의 노력으로 차츰 토가족의 신임과 숭앙을 받게 되었다 한다.

    소하, 한신 등을 모함하여 죽이게 한 여후는 장량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고조에게 장량이 반역할 것이라고 모함하여 정벌하도록 꾀어 한고조는 장량도 체포하고 토가족도 정벌할 생각으로 이 곳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토가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장량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결국 한고조도 이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체면상 이 곳이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하고 물러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장가계(張家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장량은 전쟁에서도 앞 일을 잘 내다보고 전략을 세웠지만 개인의 앞날도 잘 볼 줄 아는 명철(明哲)이었던 것이다.
    http://blog.naver.com/uniflower/14001402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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