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세종대왕 태실지는 세종대왕(1418∼1450 재위)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던 곳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사람 신체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으려고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명당을 찾아 태실을 만들었다. 세종대왕 태실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해인 1418년에 이곳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태실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적 때문에 크게 훼손되었다. 선조 34년(1601)에 대대적으로 이곳을 수리하였고, 영조 10년(1734)에 세종대왕 태실이라는 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일본은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으려고 모든 왕의 태실을 부수고 태실에 봉안된 태 항아리를 경기도 양주로 옮긴 후 태실이 있던 땅을 개인에게 팔았다. 이때 세종대왕의 태 항아리도 양주로 옮겨갔다. 지금은 이곳에 개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영조 때 세운 비석과 주변에 흩어진 석조물로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태(胎):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가리키는 말 **태실(胎室): 왕실에서 왕, 왕비, 대군, 왕세자, 왕자, 왕세손, 왕손, 공주, 옹주 등이 출산하면 그 태를 모시던 곳
문화재 설명
조선 제4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던 곳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사람 신체 가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였다. 특히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자나 왕세손 등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세종대왕의 태실은 정유재란(1597) 때 왜적에 의해 도굴, 파손되어 선조 34년(1601)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으며, 영조 9년(1733)에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실을 수리한 기록문서 『태실수의궤』를 남겼다. 그 후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1929년에 태실의 소유자인 경복궁이 태실임야를 모두 민간인에게 팔고, 태실은 경기도 양주로 옮겨갔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왕의 태실터에는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섰으며, 태실비와 태실석재 일부만이 한데 모아져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