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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빈연정사 (河回賓淵精舍)-중요민속문화재 제 86 호문화재/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2012. 10. 28. 07:18
하회빈연정사 (河回賓淵精舍)-중요민속문화재 제 86 호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 86 호 명칭
하회빈연정사 (河回賓淵精舍)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1 동 지정일
1979.01.26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북촌길 17-22 (하회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유상붕,강창구 설명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이 건물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원주목사를 지낸 겸암 유운룡 선생(1539∼1601)이 서재로 사용하던 집이다. 조선 선조 16년(1583)경에 지었다고 하며 하회마을 북촌의 서북편 경암정과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집 이름은 부용대 절벽 아래 깊은 곳을 ‘빈연’이라 부른데서 따왔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왼쪽에 앞면 1칸·옆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 2칸은 문을 달지 않았으며 옆면과 뒷면에 골판문을 달았다.
주변 경치와 조경이 뛰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넉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빈연정사 賓淵精舍 _ 류운룡이 기거했던 정사로 화천변 기슭에 위치하며, 건물과 뜰의 규모가 작고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정사를 위요하는 뜰은 가로 23m, 세로 16m의 정방형이며, 이곳에 연못을 조성하여 연꽃을 길렀다. 마루에서의 시야는 북쪽 부용대 상반부이며, 전반적으로 마을의 사랑 뜰보다 위요된 느낌이 드나, 안온하고 겸허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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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겸암 류운룡 선생은 조선 명종, 선조 때의 학자로서 자는 應見(응현)이며 풍산인으로, 증의정부 영의정 풍산부원군 仲?(중영)의 장자이고 서애 류성룡선생의 伯氏(백씨)이다.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평생 동안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둔 전형적인 선비였다. 시조는 고려초에 호장을 지낸 柳節(류절)이다.
1539(중종 기해)년 8월 6일 안동 풍산 하회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총명하여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명종9년
1554(명종9년) 16세 가을에 이씨부인에게 장가들었다. 이 때 부친이 掌樂院正(장악원정)으로 서울에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모시고 공부하였다.1557(19세)년 조부 찬성공(柳公綽)을 간성 임소로 가서 문안하는데, 시 「杆城道中書懷간성도중서회」가 있고, 금강산 유람한 기행문 「遊金剛山錄유금강산록」을 지었다. 이듬해 무오년 3월 서울의 모친을 문안하고 시 「水山道中수산도중」 및 「金灘旅店曉起口占一律금탄여점효기구점일률」을 지었다.
8월 동생 문충공(류성룡)과 함께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1559년(21세) 5월 조부 찬성공의 묘갈을 지었으며
1563(25세)년
1567(29세)년 봄에 겸암정사를 이룩하고 겸암으로 자호하였다. 퇴계 선생이 액자를 쓰고, 아래의 시 한수를 지어보냈다.1569(31세)년
가을에 향시에 합격하고,
1572(34세)년 음직으로 典艦司(전함사) 別座(별좌)가 되고, 豊儲倉(풍저창) 直長(직장)으로서 유능한 관리의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계유년 議政公(의정공)의 상을 당하였으며,
1576(38세)년 5월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 되었으나 6월에 벼슬하기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1577(39세)년 겨울 禮賓寺(예빈시) 別提(별제)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南義仲(남의중)에게 한 편지에 ‘지난여름 물러나올 때, 장차 문을 닫고 조양하며 마음을 다스리려했고 또한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벼슬자리를 맡았네, 마음 같으면 인사를 그만두고 궁벽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심신을 수습하여 학업에나 전념하고자하네’ 하였다.
1579(41세)년 司圃署(사포서) 별좌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갔다가 7월에 사표를 제출하고 근신하였다. 이듬해 다시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어 조정에 들어갔다.
1581(43세)년 3월에 청에 따라 안동복호소를 지었다. 읍지를 살펴보면 부의 동쪽 임하현에 申福(신복)이 그 어머니를 때려죽인 죄로 인해 부를 현으로 강등시키니, 민심이 흉흉했지만 신원하지 못한 지가 수년이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많은 선비들이 선생에게 疏(소)를 지을 것을 청하여, 복호 되었다.
이듬해(1583년) 4월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와서 賓淵精舍(빈연정사)를 세웠다.
1582(44세)년에 조정에서 庶官(서관)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선생이 선발되어 內資寺(내자시) 주부로 발령받았다. 가을에 진보현감으로 나갔다가1584(46세)년 9월 인동현감에 임명되자 몸가짐을 간소히 하고 직무에 부지런했으며, 관리를 다스리는 데는 엄히 하고 백성에게는 은혜롭게 하였다. 고을에 호족 몇 사람이 鄕權(향권)을 잡고 휘두르므로 그들을 법으로 얽매어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니 얼마 뒤에 폐해가 그쳤다.
1585(47세)년 봄에 야은 길선생의 묘를 수축하고 오산서원을 창건하였다. 길선생의 묘가 현의서쪽 漆津(칠진)의 오른편에 있었는데, 황폐하므로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당연히 고을 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고 牲禮(생례)를 갖추어 성묘를 하고 오태산 기슭 라월봉 아래에 院宇(원우)를 세우려 하니, 전후의 방백들이 힘을 다해 도우려 하고, 대구부사 권문해와 선산부사 유덕수, 성주목사 유몽정, 도사 이희 등도 서로 자력을 도왔다.
1587(49세)년 4월 砥柱中流碑(지주중류비)를 세우고 야은선생의 묘표를 새로 건립하였다.1588(50세)년 5월 오산서원이 낙성되어 경내의 모든 학생을 모아 공부를 시작하였다.
여러 서원의 원규와 五禮儀(오례의)를 취해 학교를 세워 院中(원중)에서 영원히 지키도록 하였으며, 吳山志(오산지)를 지었다.
1589(51세)년 推官(추관)이 되었을때, 정여립의 역옥 사건이 일어나 사방에서 체포하고 있었는데, 옆 고을의 수령이 權臣(권신)의 지령을 받고 무고하여 공을 세우려는 자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바로잡아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1590(52세)년에는 관찰사와 어사가 선생의 치적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므로, 일년을 더 유임하였다.
가을에 광흥창 주부로 가게 되어 7년간 재임하던 인동을 떠나려 하니 백성들이 사모함을 마지못해 송덕비를 세웠는데, 여헌 장현광 선생이 비문을 찬하였다.1591(53세)년 한성부 판관에 임명되었고 宗系辨誣錄功(종계변무록공)으로 光國原從功臣(광국원종공신) 3등에 봉해졌다.
풍기군수
1592(54세)년 司僕寺(사복시) 僉正(첨정)으로 승진되었으나 4월 왜란이 일어나 大夫人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 왔으며, 순찰사로부터 풍기군수가 되어 달라는 격문을 받고 취임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가을에 정식에 임명되었다.
1594(56세)년 겨울
통정대부로 승진되었고, 병난과 역질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서로 깔고 죽어 가는데, 관원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으므로, 선생이 지성으로 구휼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렸으며 또 방약을 써서 적을 쳐부수고 와해시켰다.
1595(57세)년 금계 황준량 선생이 금계위에 정사를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守僧(수승)이 관역 때문에 지키지 못하던 것을 퇴계선생이 完護文(완호문)을 지어 고을 원에게 부탁하여 영원히 역사를 면제하게 하였으나, 오래되어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을 선생이 鄕射堂(향사당) 벽 위에다가 퇴계의 完護記文(완호기문)을 새기고, 한 고을에서 영원히 옛일을 지키도록 발문을 지어 알게 하였다,
1595(57세)9월에
원주 목사로전근 되어 11월에 부임하였다. 선생이 떠나자 고을 사람 황응규가 아래와 같이 노래를 지어 거사의 뜻을 부치었다.
1596(58세)년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고을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軍國便宜(군국편의)를 개진하는 상소를 하였다, .
1598(60세)년 봄에 대부인을 모시고 다시 道心村(도심촌)으로 우거하였다. 피난 중에도 학문과 자제들의 가르침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으며, 승정원 승지에 오를 뻔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01(63세)년 3월 5일 축시 정침에서 운명하였으며 5월 15일 천등산에 장사 지냈다. 1605년 4월 扈聖原從功臣(호성원종공신) 3등에 봉해지고 5월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숙종 34년(1708) 11월 우곡서원에 위판을 봉안하였고, 1786년 9월 화천서원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출처]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 김성규 객원기자 | 안동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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