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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하회마을 화경당 고택 (安東 河回마을 和敬堂 古宅)-화경당-중요민속문화재 제84호
    문화재/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2012. 10. 28. 10:46

    안동 하회마을 화경당 고택 (安東 河回마을 和敬堂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84호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 84 호

    명칭

    동 하회마을 화경당 고택 (安東 河回마을 和敬堂 古宅)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1 곽

    지정일

    1979.01.26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북촌길 7 (하회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유세호

    설명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그 중 북촌택은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함께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규모가 큰 집으로 북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경상도 도사를 지낸 유도성이 철종 13년(1862)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 앞에 보이는 건물이 'ㅁ'자형 몸채이며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별당채이다. 사당은 별당채를 지나 안쪽에 별도로 담장을 둘러 지어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몸채는 완벽한 'ㅁ'자 평면을 가지고 있다. 앞쪽이 사랑채로 오른쪽에 큰 사랑, 왼쪽에 작은 사랑을 두었으며 각 끝칸에 대청을 만들었다. 큰 사랑에는 ‘화경당(和敬堂)’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하며, 뒤쪽 방은 서재이다. 작은 사랑 대청 뒤편으로 1칸 방이 부엌 아랫방과 연이어 있다.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세웠으며 기둥도 매우 높이 올렸다.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과 안방, 오른쪽에 아들과 며느리의 방으로 쓰는 건너방(윗상방)이 있다. 안방은 '田'자 구조로 함경도 지방의 형식을 띠고 있고 부엌은 3칸이 넘는 크기로 2칸의 아랫방과 연이어 있다. 건너방 앞에 툇마루와 연결된 방(아랫상방)은 살림을 물린 노부모가 사용하는 방이다.

    별당채는 앞면 7칸·옆면 2칸 크기로 부엌, 온돌방, 대청, 마루방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 액자가 걸려 있고 건축 구조상 많은 장식으로 꾸며 지은 집이다. 별도로 마련된 사랑채는 3문을 두고 평범하게 지어 놓았다.

    하회마을 북촌의 큰 집 중 하나이며 양반집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본보기로서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http://www.hahoe.or.kr/adboard/index.php?doc=program/doc.php&do_id=38

    이렇게 큰집이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쉽다.

     

    석호 유도성

    류도성의 자는 선여(善汝)이고, 호는 석호(石湖)다. 수신와(須愼窩)·송만(松灣)은 별호이다. 1823년(순조 23년) 12월 28일에 태어나 일찍부터 호학호문하였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향촌에서 후학을 육성하며 영남일대 유림 사회의 영수급으로 지내다가 1882년(임오년) 당시 영의정 홍순목의 추천에 의해 경상도사를 역임하였다.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향년 84세로 1906년(고종 1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류도성은 을해년 집을 짓기 위해 양질의 춘양목을 강변에 적재 건조 중에 있던 중, 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상갓집에 조문 갔다 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전복되고, 또한 인근 동네에서 떠내려오던 목숨이 경각에 이른 많은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재목 일부는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붙잡고 살게 하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류도성은 이후 어렵게 재목을 다시 구해 현재의 집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당초의 재목으로 건축하였더라면 건축연도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1895년(을미년)에 단발령이 공포되고 왕명을 받은 칙사가 내려와서 유림 사회의 영수가 단발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며 단발을 강요하자 목숨을 바칠지라도 머리는 깎을 수 없다는 추상과 같은 반론에 그대로 물러갔다 한다.
    농민전쟁이라고 사가들이 일컫는 갑오 동학난 때에도 동학군(소작민)을 맞이하고도 무사했던 것은 지주로서 소작인에게 얼마나 후덕했던가를 증명하는 일이라 하겠다.
    1905년(을사년) 83세 때 나라의 국치를 들으시고는 매국노 5명을 처단하라는 “을사오역토소”상소를 올려 울분을 토하였으며 독립활동에 많은 재산을 쾌척하고 의병활동에 참여 지휘장을 맡아 여러 문중의 힘을 단합하는데 진력하였다.
    류도성의 도량과 인품을 엿볼 수 있으며 사사로움을 버리고 대의를 택함으로써 동민과 영남 일대 유림으로부터 더 한층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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