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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덕 충효당 종택 (盈德 忠孝堂 宗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68호
    문화재/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2019. 3. 2. 08:51

    영덕 충효당 종택 (盈德 忠孝堂 宗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68호

     

     

     

    국가민속문화재 제168호

               

    국가민속문화재 제168호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68호

    명칭

    영덕 충효당 종택 (盈德 忠孝堂 宗宅)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

    2필지/지정구역 2,215㎡, 보호구역 3,335㎡

    지정일

    1984.01.10

    소재지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6길 48 (인량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이홍선,이지화

    설명

    조선 성종 때에 처음 세운 집으로 이애 선생이 짓고,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뒷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하며 충효당(사랑채)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건물이다.

    안채,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이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원에도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는 대규모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어울려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의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사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앞쪽 들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뒷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높은 기단 위에는 지금도 후학의 교육장으로 이용되는 충효당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고루 갖추어 있는 조선시대 양반집으로 처음 지은 것은 조선 초기로 추측되나 이 집은 후대에 옮긴 건물이다. 그러나 안채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시기가 조선 중기로 짐작되는 건물로, 다소 변형된 듯 보이지만 조선 시대 주택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사당으로 들어서려니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휘황찬란한 모양세로 구부러져 한창인 제철 꽃 색을 뽐내며 사당과 하늘을 향해 기묘한 가지들을 추켜 세우고 입구를 비호하듯 서 있다. 알고 보니 이 두 그루의 배롱나무는 '간지럼 타는 나무'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이 배롱나무의 둥치를 살살 간질이면 위의 가지들이 살살거리며 간지럼을 탄다는 일화가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었던 것.
    사당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또 하나의 놀라움을 발견한다. 장대한 나무둥치에 머릴 박을 뻔하며 고갤 들자, V자 형태로 둥치부터 갈라져 올라가는 효자나무가 버티고 있다.
    특이한 V자 나무의 한쪽은 서울에 거주하는 후손들을, 한 둥치는 지방에 거주하는 후손들 의 안부를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양쪽 가지들이 평탄하게 잘 자라면 후손들도 평안하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한다. 또 벌어진 둥치 사이로 제사상이 수월하게 넘나들 수 있기에 더더욱 효자나무라 일컬어 진다 했다.

    http://tour.yd.go.kr/kor/thema/themaView.aspx?idx=66

     

     

     

     

     

     

     

     

     

     

     

     

     

     

     

     

     

     

     

     

     

     

     

     

    이개지(李介智)

    맏아들 맹현(孟賢)과 둘째 아들 중현(仲賢)이 과거를 거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여 다시 명문으로 부상했다. 특히 맹현은 1460년(세조 6)에 행한 춘당대시(春塘臺試)에 장원하고, 이어 1466년(세조 12) 세조가 현직 문관들을 상대로 실시한 발영시에도 합격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선으로 당시 실권자였던 윤오(尹塢)의 사위가 되었다. 따라서 맹현은 함녕군(태종의 서자)의 외손이 되었다. 이러한 탄탄한 입지와 높은 학문, 이조참판과 나주목사 등 내,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어 청백리에 뽑히면서 당대 명신이 되어 확실한 기반을 잡게 되었다. 그에게는 7남 2녀가 있었는데 제5자 종(瑽)이 진주파, 제6자 애(璦)가 영해파가 되는 이외에 나머지는 기호파로 활동하게 된다.

     

    이애(李璦)가 영해 입향조가 된 것은 중부 이중현(李仲賢)이 이곳의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올 때 책실(冊室)로 함께 와 토박이인 진성백씨의 처녀와 혼인을 맺게 되고, 이 후 계속 이곳에 정착하여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등 훗날 퇴계학파의 거유를 배출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1604년(선조 37)에 지은 고색창연한 건물 충효당(중요민속자료 제168호), 살림집(같은 민속자료 제 168호의 1), 사당( 같은 민속자료 제168의 2)이 있다.

     

    원래 이애(1480~1561)가 지은 것인데 임란 후 약간 뒤쪽으로 옮겨 안채와 사랑채, 사당을 지어 조선시대 양반가옥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갈암(葛庵)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났으며 <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 역시 이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러나 영해파를 조선의 명문가(名門家)로 다시 발돋움하게 한 것은 이애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의 노력이 컸다. 1609년(광해군 1)대과에 급제할 만큼 실력도 당당했지만 마당 6,000석의 영남 5위의 부자이기도 했다. 임란 때에는 의병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어 나라 사랑에 앞장섰고, 거처를 잃고 떠돌아다니며 끼니를 잇지 못하는 백성들의 구흘(口吃)에도 힘썼다. 특히 흉년이 들어 양식이 모자랄 때 그는 하인들에게 도토리를 주어오게 하여 1년에 200여 가마니를 확보해 찾아온 베고픈 사람들을 위해 하루 300여 명에게 죽을 쑤어주었으며, 어떤 때는 7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부인인 진성이씨는 물론 셋째 며느리인 안동장씨(나중에 정부인으로 추증)마저 손톱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이러한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풍습과 어진 마음으로 적선(積善)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란 후손들이 어찌 훌륭하게 되지 않겠는가?

    http://blog.daum.net/ljw1674/1830176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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