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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및옥오재 (霽月堂및玉吾齋)-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2. 18. 22:08
제월당및옥오재 (霽月堂및玉吾齋)-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종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명칭
제월당및옥오재 (霽月堂및玉吾齋)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일곽 지정일
1989.03.18 소재지
대전 대덕구 계족로 750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은진송씨문희공종중 설명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문신 송규렴(1630∼1709)이 지은 별당건물로 그의 호를 따서 제월당이라 하였다. 지금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왼쪽 2칸은 대청마루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방 뒤쪽에는 1칸을 더 내어 위는 누다락, 아래는 아궁이로 사용한다.
옥오재는 송규렴의 아들인 송상기(1657∼1723)가 지은 건물이다. ‘옥오(玉吾)’는 차라리 깨어지더라도 옥(玉)을 택하겠다는 소신이 담긴 뜻으로, 충성스러운 말과 도리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제월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겸하도록 지은 ㄷ자형의 전통적인 민가건물이다.문이 닫혀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들어가 볼 기회를 기다리면서
송규렴 [宋奎濂]:1630(인조 8)~ 1709(숙종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 아버지는 이조판서 국전(國詮)이다. 송준길의 문인으로,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지평·정언·서천군수 등을 지냈다. 1667년(현종 8) 사간을 거쳐 집의를 지내다 잠시 병으로 사직했으나, 다시 사간으로 등용되었다. 1674년 일어난 2차 예송(禮訟)으로 귀양간 송시열·송준길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파면당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재기용되어 수찬·사성·공조참의·대사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숙청당하자 사직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대사헌·대사간·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는 의 중심인물로 정치적 변동에 따라 부침(浮沈)이 많았으나, 계속 내외의 요직을 지냈다. 정치론에 있어서 임금의 마음이 만화(萬化)의 근본임을 강조했으며, 성학(聖學)이 베풀어지고 인심(人心)이 유행하는 사회를 이상으로 여겼다. 송시열·송준길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불렸다. 저서에 〈제월당집〉이 있다. 회덕 미호서원(渼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송상기(宋相琦)
1657(효종 8)∼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옥여(玉汝), 호는 옥오재(玉吾齋).
예조판서 규렴(奎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동지(同知)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홍문관저작을 지내면서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풍부하여 홍문관에서 상주하는 글은 대개 그가 지었다. 박사·검열을 거쳐, 부수찬으로 있을 때 희빈(禧嬪) 장씨(張氏)어머니가 가마를 탄 채 대궐에 출입하므로 가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청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689년 부교리로 복직되었으나 이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이 사형당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민비(閔妃)가 복위되고 남인이 제거된 후 장령에 임명되어 부교리·사간·충주목사를 거쳐 보덕·교리·사인을 지냈다.
1697년 세자책봉에 대한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는 여러 번 정문(呈文)을 지었는데 문장(文狀)의 사리가 명확하여 청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돌아온 뒤 품계가 올라 승지가 되었다.
그뒤 노론의 중신으로서 대사성에서 예조·이조의 참의가 되고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으며,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 크게 치적을 올렸다. 대제학·대사헌·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내고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718년 민회빈(愍懷嬪: 昭顯世子妃)의 시호 개정을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는데 곧 예조판서에 기용되었다.
다시 이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다가 경종이 병이 있어서 세제에게 청정(聽政)을 시키자고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상소하였기 때문에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를 입어 강진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옥오재집》이 있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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