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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애당 (松崖堂)-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2. 18. 21:38

    송애당 (松崖堂)-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종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명칭

    ()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

    1동/42.15㎡

    지정일

    1989.03.18

    소재지

    대전 대덕구 계족로 589번길 39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경주김씨송애공파종중

    설명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김경여(1597∼1653)가 지은 별당건물로, 고종 26년(1889)에 다시 지었다. 그의 호를 따서 송애당이라 이름지었다.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구조는 왼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송애당 (松崖堂)1889년 조선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때 독전어사(督戰御史)를 지냈던 송애당 김경여(金慶餘, 1597∼1653)가 병자호란 이후 고향에 돌아와 거처하며 북벌정책을 논하던 별당 건축으로 그의 호를 따서 송애당(松崖堂)이라 하였으며, 동춘당과 흡사한 구조이다. 송애당(松崖堂)은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아담한 마당과 뒷편에는 계단식의 후정이 ㄷ자 형태로 되어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정면 3칸 중 좌측 2칸은 대청이며, 우측 1칸은 온돌방으로 사용하였다. 온돌방 후면에는 반칸을 안으로 들여서 위는 반침으로, 아래는 온돌 아궁이의 함실로 이용했다.
    창호(窓戶)는 대청의 전면은 머름중방 위에 4분합 띠살 들어열개문을 달아 연목에 달려있는 걸쇠에 걸도록 하고 있으며, 대청의 측면과 후면에는 쌍여닫이 판자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전면에 쌍여닫이 띠살문과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을 각각 달고 있다. 그리고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4분합 맹장지 들어 열개문을 설치하였다.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네모 뿔형 주초석을 놓고 민흘림 방형기둥을 세웠는데 주상부에는 조각을 한 양봉을 건물의 내외 방향으로 짜맞춰 대들보의 단부를 일부 보강해 주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 양편에 동자주을 세워 종보를 받고 있는 5량집이며, 종보 위에는 낮은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의 정면에는 송애당(松崖堂)의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는 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건물은 잘 정비되어 있으며, 그 주변에 공원이 조성됨으로써 더불어 역사적 의미를 지닌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http://cafe.daum.net/qcom/M0jm/156?docid=190736168&q=%BC%DB%BE%D6%B4%E7%20%B1%E8%B0%E6%BF%A9&re=1

     

    김경여(金慶餘)
    1596(선조 29)∼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유선(由善), 호는 송애(松厓).
    아버지는 찬성(贊成)에 추증된 광유(光裕)이며, 어머니는 송씨(宋氏)로 염수(袡壽)의 딸이다. 이귀(李貴)의 사위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별좌(別坐)가 되었으며, 그뒤 직장(直長)·주부·부여현령을 역임하였다.
    1632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때 토목공사의 중지를 청하였다가 성균관직강·시강원사서에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회덕으로 돌아가 생활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 대간에 임명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혔으나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교역(金郊驛)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48년 승지로 발탁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1649년 대사간이 되어 육조소(六條疏)를 올렸으며, 또한 김자점(金自點)의 잘못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650년(효종 1)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동문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집(金集)과 교유하였으며, 출처와 의리에 분명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회덕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봉향되었고, 저서로는 《송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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