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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재(東山齋)-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3호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5. 10. 31. 15:17
동산재(東山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3호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3호
명칭
동산재(東山齋)
분류
유적건조물
수량
일원
지정일
2006.02.16
소재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661
시대
소유.관리
설명
동산재는 광주이씨 석전문중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낙촌 이도장(各村 李道長)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13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 와가의 낙촌정, 장자 귀암 이원정(歸巖 李元禎)의 유덕과 공적을 알리기 위해 1903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경암재, 장손 정제 이담명(靜齋 李聃命)의 별사봉향을 위해 세운 정면4칸 측면1칸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와가의 소암재와 묘실, 대문채, 관리사를 일괄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재사(齋舍)와 정사(亭舍)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면서 건립 순서와 세계(世系)가 역순 이면서도 건축구성상 정연한 위계성을 갖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건물이 초창 이후 큰 변형이 없이 유지되어 건립당시의 건축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보존 할 가치가 있어 경상북도에서 기념물적 성격의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경암재
소암재
낙촌정
귀암 이원종 신도비
낙촌 이도장
이도장1603(선조 36)∼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준경(遵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복(希復)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윤우(潤雨)이며, 어머니는 인천채씨(仁川蔡氏)로 생원 응린(應麟)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곧 승문원권지정자로 등용되었다. 그 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주서 등을 지내다가, 1634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636년 다시 주서로 복직하고,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이듬해인 1637년 검열이 되었고, 이어서 봉교가 되었다가 지평으로 승직하였다. 1638년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에, 청나라에서 요청하여온 군사의 파견을 앞장서서 막았다.그 뒤 수찬을 지내고, 외직인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 등으로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귀암 이원정
이원정1622(광해군 14)∼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아버지는 도장(道長)이며, 어머니는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큰 학자였던 할아버지 윤우(潤雨)에게도 수학하였다.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70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168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대출척으로 초산에 유배가던 도중에 불려와 장살당하였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원된 뒤에도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추탈(追奪)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있으며, 편저에는 『경산지 京山志』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정재공 이담명
이담명1646(인조 24)∼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공조참의 윤우(潤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찬 도장(道長)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원정(元禎)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좌부승지 언영(彦英)의 딸이다.허목(許穆)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어 봉상시봉사·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로 나갔다.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되어 아버지 원정의 유배지 초산에 따라갔다.1683년(숙종 9) 다시 복관되어 우승지·전라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진정(賑政 : 재해를 구제하는 정책)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도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를 세웠다.외직에 있을 때에 견문한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들어 시정책을 강구한 상소를 올렸으며,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서전차의 書傳箚疑>·<기뇌홍 記雷虹> 등 많은 잡저를 남겼고, 저서로는 ≪정재문집≫ 8권이 있다.http://people.aks.ac.kr/index.ak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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