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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 성주 응와종택 (星州 凝窩宗宅)-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문화재/내가 본 시도민속자료 2015. 10. 28. 13:30
성주 응와종택 (星州 凝窩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명칭 성주 응와종택 (星州 凝窩宗宅)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일곽
지정일
1983.06.20
소재지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번지
시대
조선시대
소유
관리
이수학
설명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이 살던 곳으로,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조선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순조 21년(18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사랑채는 고종 3년(186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장판각, 안대문채, 마굿간, 아래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은 비교적 연대를 믿을 수 있는 건물로 한옥 주택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이다.이이신 매입
아들 돈재 이석문 북쪽으로 문을 내어 북비고택
아들 사미당 이민겸 규모 확장
아들 농서 이규진 정침 신축
아들 응와 이원조 사미당 낙성
북비고택
이이신
돈재 이석문
사미당 이민겸
농서 이규진
응와 이원조
북비고택
영조 50년(1774) 터전을 잡은 이 집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뒤 북쪽에 사립문을 냈다. 집주인인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북비택'이라는 이름과 '북비공'이라는 이석문의 호는 북쪽으로 난 문에서 비롯되었다.
훗날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이석문에게 훈련원 주부라는 벼슬을 내려 출사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이곳에 은거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그가 벼슬을 거절하며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하게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저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했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했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
이석문의 손자인 이규진이 장원 급제하자 정조가 그를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라고 질문했다. 어린 정조를 업고 들어가 아버지(사도세자)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 곤장을 맞고 벼슬에서도 쫓겨난 이석문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 것이다. 이후 사헌부 장령까지 오른 이규진은 순조 21년(1821)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짓고 북비문 내의 맞배집을 서재로 고쳤다.
이 가옥은 특이하게도 건물 뒷부분이 먼저 보인다. 북쪽으로 일각문을 냈기 때문이다.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댁 등 5채로 구성되었고, 북비댁은 별도의 담으로 구획되었다. 안대문채는 안대문, 마방,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8칸으로 매우 큰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독립 사랑채와 안채의 ㅁ자형 배치, 솟을대문 등은 당시 고관 가옥의 특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이며 잘 가공된 기단이 있는 맞배지붕 홑처마 가옥으로, 기둥에는 흰색 바탕에 청색 글씨의 주련이 걸려 있다. 평면은 북쪽으로 불발기 창이 없는 대청 한 칸에 온돌방 두 칸을 두고 남쪽으로 지형을 이용해 끝에 누마루 형식의 대청마루 한 칸과 온돌 한 칸을 두고 있다. 누마루에 앉으면 대문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고 멀리 마을 앞에 있는 안산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아래채로 가는 북비문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형식을 하고 있어 안채와 아래채의 동정을 살필 수도 있다.
사랑채 대청마루 옆으로 난 쪽마루를 이용해 벽은 넌출문 으로 막고 안채 담장을 추녀 밑으로 막아 안채와 이어지는 통로를 만든 모습이 재미있다. 이 사이로 뒤뜰의 사당이 보이며 안채와 공간을 구분하는 간벽은 기와를 이용했다. 한개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와를 이용한 벽담이다.
북비문을 지나면 네 칸 규모의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배치는 오른쪽에서부터 대청마루 두 칸에 온돌방 두 칸이다. 현재는 마루 북쪽을 판벽과 판문으로 막아 남향집처럼 쓰고 있다. 사랑의 한쪽은 툇마루 없이 남쪽으로 돌출한 부분에 긴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고, 뒤쪽에 부엌이 있다.
안채와 한 단 낮은 기단 위에 一자형으로 뻗은 아래채가 있고, 전면에 우진각 지붕을 한 곳간채가 남쪽에 一자형으로 놓여 있다. 정침도 一자형인데 자연석 초석 위 전면에는 원주를 사용했다. 두 칸 대청의 서쪽에 온돌방 한 칸, 동쪽에 온돌방 두 칸이 있고, 동쪽으로 부엌이 있다. 안채로 연결되는 동선 방향을 주목할 만한데 서쪽 대문을 통해 사랑채에 다다르고, 사랑 앞마당을 지나 안채의 아래채 옆으로 출입할 수 있다.
안채의 건넌방은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마을 단위로 공부하는 공간인 재실 겸 서당과는 별도로 한 가족이 운영하는 이른바 사교육 공간이다. 사랑채의 작은 사랑방은 서실로 사용되었으며 이곳 역시 서당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한다.
북비고택의 자랑 중 하나는 장독대다. 담을 두르고 기와집을 얹는 것이다. 집안의 멋을 좌우하며 주택의 품계를 한 단계 높여준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에 기와로 예쁜 문양을 만들어 화초담 모습을 섞은 흙 돌담도 보인다.
장독대는 한옥에서 매우 중요하다. 집안의 먹을거리를 좌우하므로 안주인의 생활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기도하는 공간이라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보관하고 발효시키는 곳이자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장독은 실용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공간으로 한옥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안채와 사랑채 앞쪽에는 일반 주택에서 사용을 금지했던 원기둥이 보인다. 안채의 원기둥은 대초당에 있던 재목을 옮겨 사용했다고 하지만,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이 집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비고택과 교리댁에는 커다란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있다. 김해숙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가문에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2명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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