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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세오충렬유적 (三世五忠烈遺蹟)-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8. 20. 23:21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명칭

    삼세오충렬유적 (三世五忠烈遺蹟)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

    11,018㎡

    지정일

    1982.08.30

    소재지

    전북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 131-1

    시대

     

    소유.관리

    사유,오근석

    설명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해주오씨 오충신(五忠臣)의 무덤과 사당인 충렬사가 있는 곳이다.

    충렬사는 조선 숙종 7년(1681)에 세웠고 오응정과 그의 아들 욱과 직, 직의 아들 방언을 모셔 사충사라 하였으나 근래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도 함께 모심에 따라 오충사라 부르고 있다.

    오응정은 조선 선조 7년(157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서 공을 쌓았으며 정유재란(1597) 때는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선조 30년(1597)에 아들 욱, 동량과 더불어 남원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참패하자 화약더미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를 기리어 영조 35년(1759)에 용안에서 오응정을 제사하고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오응정의 차남 직은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도원수 강홍집 밑에서 요동심하전투에 출전하였으나 강홍립이 후금군에게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부차(富車)에서 적과 싸워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직의 아들 방언은 병자호란(1636)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자 샛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삼세오충렬유적 (三世五忠烈遺蹟)

               

    삼세오충렬유적 (三世五忠烈遺蹟)

     

     

     

     

     

     

     

     

     

     

     

     

     

     

     

     

     

    들어갈 수 없었다.

     

     
     
    1548(명종 3)∼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중(文仲), 호는 완월당(翫月堂)·응정(應井).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이름을 응정(應井)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현감 하몽(下蒙)이다.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에 몽진(몽진 : 임금이 난시에 피난함)할 때 호종하였으며, 수탄장(守灘將)으로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다.
    1594년 중군이 되어 전공으로 상을 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행호군(行護軍)이 되어 전라도 순천을 수비하고, 이어서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전라도방면을 유린하는 왜군의 방어에 나섰다. 같은 해 8월 문안사(問安使)로서 남원총병부(南原摠兵府)에 파견되었으나, 곧 전라도방어사로 임명되었다.
    왜적이 남원에 밀려들어 남원성싸움에 참여하여 중군 이신방(李新芳),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병마절도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남원부사 임현(林鉉) 등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으며, 남원금산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오욱(吳稶) -오응정의 아들
    1571년(선조 4)∼1597년(선조 30). 조선 중기의 충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출신지는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용안면(龍安面)이다.
    부친은
    오응정(吳應鼎)이며, 동생으로 오동량(吳東亮)오직(吳稷)이 있다.
    1596년(선조 29)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어모장군(禦侮將軍) 충무위부사정(忠武衛副司正)으로 종군하였다. 전라도방어사(全羅道防禦使)인 아버지와 당시 의병 활동을 하던 동생 오동량과 합류하여 남원성에 들어가서 싸우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삼부자가 화약더미 속에서 장열하게 산화하였다. 동생 오직은 1619년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조직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의 우영천총(右營千總)이 되어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고, 오직의 아들 오방언(吳邦彦)은 병자호란 때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청하여 출전하였다가 왕이 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오씨삼세오충(吳氏三世五忠)’이라 불렀다. 삼부자는 선조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고 현종 8년에 정려(旌閭)가 내렸다. 용안면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충렬사는 현재 ‘오충사(五忠祠)’라고도 불리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다.
    오직(
    1575(선조 8)∼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형(士馨). 할아버지는 현감 하몽(下蒙)이며, 아버지는 춘천부사(順天府使) 응정(應鼎)이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에 등용, 1596년에 선전관으로 비변사의 낭관을 겸하였다.
    1614년(광해군 6)에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서 북쪽 오랑캐를 방어하는 방책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18년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우영천총(右營千摠)이 되어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북정(北征)하였다.
    그 해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승직되었다. 이듬해인 1619년에 부차(富車)에서 적을 치던 중 좌우 산속에 매복하고 있던 적 수천명이 불시에 협공해오자 겁을 집어먹은 주장 이일원(李一元)이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자 그는 이일원을 크게 꾸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좌영장 김응하(金應河)와 힘을 합쳐서 적은 병력으로 계속 전투에 임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8, 9차례나 싸웠으나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그는 백마를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수많은 적을 죽인 뒤에 스스로 칼을 물고 김응하와 함께 자결하였다. 뒷날 현종 때에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 따라 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오동량(吳東亮)-오응정의 아들
    1577년(선조 10)∼1597년(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사운(士雲)이고, 호는 운탄(雲灘)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용안면(龍安面)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응정(吳應鼎)이다. 3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형은 오욱(吳稶)오직(吳稷)이이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랑 겸 선전관(備邊郞兼宣傳官)을 역임하였고, 어모장군(禦侮將軍),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를 거쳐 일시 귀가하여 본가에 머물고 있다가 장성(長城)에서 일어난 의병에 합류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방어사(全羅道防禦使)였던 부친에게 합류하였다. 전라도에 침입한 일본군은 1597년 음력 8월 15일 대대적인 공세로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남원성에는 명나라 총병 양호가 이끄는 3, 000명의 명군과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이복남방어사(防禦使) 오응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 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에 마침내 남원성은 함락되자 그는 아버지와 큰형 오욱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놓아 자폭하여 자결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오응정과 그 세 아들은 용안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오방언( 
    ?∼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길포(吉浦), 호는 순풍정(順風亭). 현감 하몽(下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천부사 응정(應鼎)이며, 아버지는 도총부도사 직(稷)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떠한 사람에게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찍이 문명이 높아 고을의 천거로 사재감(司宰監)의 참봉을 거쳐, 예문관대교(弘文館待敎)를 지냈다. 1616년(광해군 8) 봉사로 재직시 능창대군모역사건(綾昌大君謀逆事件)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성균관의 박사·전적(典籍) 등 요직을 지냈다. 1636년 (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崔鳴吉)의 강화론이 유력하여 강화가 이루어지자 이를 반대하여 학사 윤집(尹集)에게 “나라의 원수도 갚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원수조차 갚지 못하였는데 어찌 오랑캐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는 불쌍하게 생각하여 군졸을 시켜 시신을 찾아내어 고향땅에 안장하게 하였다. 부인 정씨(鄭氏)도 남편의 시신을 건져 장례를 치른 뒤 목숨을 끊었다. 나라에서는 정려의 은전을 내려 부부의 충렬을 포상하였다. 금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고,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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