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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국보 제7호문화재/내가 본 국보 2013. 7. 28. 23:00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종목
국보 제7호
명칭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
1 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3길 77-48 (대홍리) 시대
고려시대 소유.관리
국유,천안시 설명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천년이 된 비가 완벽하다. 놀랍다.
안종(이름은 욱(郁). 고려태조(太祖)의 여덟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라경순왕(敬順王)의 큰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의 딸인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이다.집이 개성송악산(松嶽山)의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부근에는 경종(景宗)의 비(妃)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사저가 있었다. 마침 경종이 죽고 헌정왕후가 사제에 나가 있던 중 안종(安宗)이 그녀와 친하게 지냈다가 서로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사수현(泗水縣: 현재 경상남도 사천)에 유배되고, 헌정왕후는 현종(顯宗)을 낳은 뒤 곧 죽었다.어린 현종은 성종(成宗)에 의하여 길러지다 두 살 때 유배지에 있는 안종에게 보내져 성장하게 되었다. 안종은 문장에 능통하고 또 풍수지리에도 밝아 죽으면 묻힐 묘지까지 정해놓았다고 한다.1009년 왕위에 오른 현종은 1017년 그의 묘를 건릉(乾陵)에 이장하고 후에 무릉(武陵)이라 칭하였으며, 추존하여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였다가 1021년효의대왕(孝懿大王)이라 고치고, 묘호(廟號)를 안종이라 하였다.현종(이름은 왕순(王詢). 자는 안세(安世). 아버지는 태조(太祖)의 여덟 째 아들인 안종(安宗)욱(郁)이다. 어머니는 경종의 비 효숙왕후 황보씨(孝肅王后皇甫氏)이다.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있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해 목종이 폐위되자, 1009년 2월에 왕위에 올랐다. 고려왕조가 성립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였다.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十訓要)」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북진정책의 실천으로 북방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이러한 정책은 현종대에 구체화되었고,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대내적으로 호족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책과 군현제의 완성이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대외적으로는 태조 이래 북방외교의 현안문제였던 대거란(對契丹)관계가 비로소 해결을 보게 된다. 현종의 대거란정책은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 현종 1)과 제3차 침입(1018년, 현종 9)과정에서 잘 나타난다.제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江東) 6주의 반란을 요구하며 제3차 침입을 하였다.이 때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했고, 퇴각하다 강감찬(姜邯贊)에게 구주(龜州)에서 패해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해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비록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덕종·정종조의 안정기를 오게 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하여 착수, 제작한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최충(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아버지는 온(溫)이다.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그 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1033년(덕종 2)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說苑)』 육정(六正)·육사(六邪)의 글과 한(漢)나라에서 자사(刺史)에게 준 6조(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다.정종 초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했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 금지를 청해 시행하게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이라는 벼슬과 상주국(上柱國)이라는 훈작을 받았다.1055년내사령(內史令)이 되었는데, 이후 관제 개정으로 인하여 내사문하성을 중서 문하성으로 개칭하였으므로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이렇게 관인으로 현달했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교육과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고려사』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鄕學)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문교(文敎)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었다. 특히, 문반(文班)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그가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그리하여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 등으로 지어 구재학당을 마련, 본격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하였다.그는 질서와 법도를 갖춘 교육사업을 전개해, 당시 이곳의 학생은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冲徒),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불렸다.구재(九齋)에서는 구경(九經 : 周易·尙書·毛詩·儀禮·周禮·禮記·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삼사(三史 : 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시부(詩賦)와 사장(詞章), 즉 문학이나 유교 교육의 일방적인 요청에 따라 문장공부도 많이 시켰다. 그러나 과거를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이며 함축성 있는 인격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그의 교육방침은 하과(夏課)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여름에는 피서를 겸해 개경탄현(炭峴) 밖에 있는 귀법사(歸法寺) 등의 산사(山寺)·승방을 빌려 공부하였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자를 선정해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다.간혹 저명한 학자나 대관들이 들르면, 생도들과 함께 초에 금을 긋고 시간 내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였다. 이 때 성적을 발표해 차례로 불러앉히고 소작(小酌)을 베푸는데 진퇴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서열이 분명해 종일토록 서로 수창(酬唱)하는 것이 볼만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이 때문에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그의 도중(徒中)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또 이것을 모방해 개경에 11개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이들 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지내고 유학에 힘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해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나갔다.그 중에서도 그의 도가 제일 먼저 이루어지고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어, 그는 한국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으며,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것이다.그 뒤 그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행(文行)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연면히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백현례(본관과 자·호를 비롯하여 출신배경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벼슬은 종6품 봉의랑(奉議郎)·국자감승(國子監丞)을 지냈으며, 1026년(현종 17)에 왕명으로 창건된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개창비문(開創碑文)을 썼다.이 비의 글씨에 대하여 이조묵(李祖默)과 오경석(吳慶錫)은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와 비슷하고, 서법이 매우 힘차서 대각국사비와 비견되는 의의를 지닌다고 평한 바 있다. 현재 전하는 유작은 없다.김억렴(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큰아버지이며.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아버지. 관등은 잡간(匝干)이었고,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를 지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대단히 기뼈하며 신라의 종실과 혼인하기를 원했다.이에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을 천거해 왕건(王建)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욱(郁)으로 뒷날 그의 아들이 현종(顯宗)이 되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시(追諡)하였고 욱을 안종(安宗)으로 추봉하였다.그런데 고려 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에 태조가 이 주에 거둥하여 비로 삼았으므로 혹은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하였다.”고 하여 신성왕후가 이정언의 딸인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협주란 지명은 현종이 즉위한 뒤에 개칭된 것으로 이전에는 대량주군(大良州郡), 또는 대야주군(大耶州郡)으로 불리었다는 점과, 왕비를 군(君)으로 책봉한 예가 고려시대에는 없었다는 것, 또한 『왕대종록』에는 태조의 후비가 25인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29인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왕대종록』의 기록은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다.'문화재 > 내가 본 국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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