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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유릉(裕陵)-Hongneung and Yureung Royal Tombs, Namyangju- 사적 제207호-23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7. 4. 23:48
World Cultural Heritage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유릉(裕陵)
-사적 제207호 23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27th King Sunjong and his first queen Sunmyeonghyo,second queen Sunjeonghyo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제27대 순종(재위 1907~1910)과 순명효황후,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으로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왕과 문정왕후에게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이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홍릉(洪陵) 이희(이명복) 1863~1907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52년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에서 출생하였다.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그러나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게 하였다. 그 뒤 고종은 장성하게 되면서 직접 통치를 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다스린다는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을 환수하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였다.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의 항구를 개항하여 개화 문명을 수용하였다.일본 공사(日本公使 : 三浦梧樓)는 친일 정객과 모의하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차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저서로는 『주연집(珠淵集)』이 있다.능은 홍릉(洪陵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이다.27대 순종유릉(裕陵) 이청 1907~1910 1874(고종 11)∼1926. 조선 제27대 왕.재위 1907~1910.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다.탄생 다음 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에 민씨(뒷날의 純明孝皇后)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새로이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다.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정객의 매국 행위로 왕위를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황제(皇弟)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하였고,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4년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강점 공작으로 국권이 점차적으로 제약되고 있었다. 마침내 송병준(宋秉唆)·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매국정객과 일본의 야합으로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는 경국(傾國)의 비사(悲史)와 민족사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정치를 시작하였다.내정간섭권을 탈취한 일본은 동시에 얼마 남지 않았던 한국 군대를 재정 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해산시켜 우리 겨레의 손에서 총·칼의 자위조직마저 해체해 버렸다. 또한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 버렸다.이처럼 순종을 허위(虛位)의 황제로 만들어 버린 이토(伊藤博文)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소네(曾彌荒助)를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온 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고자 더욱 거센 공작을 펴게 되었다.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한국과 만주문제를 러시아와 사전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에 의하여 포살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력 강점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일제는 이러한 침략의도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의 원(願)에 의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 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우리 겨레는 순종 즉위 전부터 야만적인 침략행위에 의병투쟁으로 대항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의거로 맞서기도 했다. 또한 민족의 저력을 키워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애국계몽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경과 온건으로 나누어진 민족저항의 역량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일부 친일매국노의 암약으로 나라를 그르치게 되었던 것이다.순종 주변에는 친일매국대신과 친일내통분자만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최고의 수렴자로서의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었다.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으로 예우하고 왕위의 허호(虛號)는 세습되도록 조처되었다.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에 승하하였다.6월에 국장을 치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해 6·10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사적 제207호 사적 제207호
종목 사적 제207호 명칭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유릉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211,286㎡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홍유릉관리소 설명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황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사적 제207호 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유릉(裕陵)-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유릉(裕陵)-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유릉(裕陵)-사적 제207호 '문화재 > 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