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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6th King Danjong Royal Tombs-영월 장릉 (寧越 莊陵)-사적 제196호-5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7. 4. 23:35
영월 장릉 (寧越 莊陵)
-사적 제196호 ⑤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6th King Danjong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제6대 단종(재위1452∼1455)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장릉(莊陵)단종비사릉(思陵) 이홍위 1452~1455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왕세자 책봉이 있던 해, 문종은 왕세자를 위해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이 때 문종은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즉위에 즈음해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로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이개·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측근에서 협찬하였다.이 해 윤9월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물었다. 이에 박팽년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해 경연에서 강의할 때마다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했던 것이다.이 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躽) 등 40명이 뽑혔다.온성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 인·김종서·정분(鄭苯) 등에게 자문해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한편,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그 해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다.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러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8월에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해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해 알리도록 했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였다.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 관찰사에게 유시해, 둔전(屯田) 설치 계획을 수립해 알리도록 하였다.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측근들의 계책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를 그의 집에서 죽이1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을 대궐로 불러와서 죽였다. 그들의 죄명은 숙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일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을 조신들의 주청에 따라 강화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왕의 의사는 무시되었다.이 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해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이러한 주변 정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위 사건의 주동 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 : 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이야말로,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의무라 생각하였다.이들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해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礩)의 고발로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 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었다.이에 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왕과 문정왕후에게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이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6호 사적 제196호
종목 사적 제196호 명칭 영월 장릉 (寧越 莊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3,495,236㎡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영월군 설명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장릉 → 영월 장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사적 제196호 사적 제196호 영월 장릉 (寧越 莊陵)-사적 제196호 영월 장릉 (寧越 莊陵)-사적 제196호 '문화재 > 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