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World Cultural Heritage-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홍릉(洪陵)-Hongneung and Yureung Royal Tombs, Namyangju- 사적 제207호-22
    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7. 4. 23:42

    World Cultural Heritage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홍릉(洪陵)-사적  제207호 22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26th King Gojong and his wife Queen Myeongseong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제26대 고종(재위 1863~1907)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1851~1905)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  
    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집현전직제학 양성지≪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으로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 왕과 문정왕후에게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이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

     

     
    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홍릉(洪陵) 이희(이명복) 1863~1907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 즉위과정
    1852년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세도 정치를 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 김씨 세도의 화(禍)를 피해 시정(市井) 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했던 이하응조성하(趙成夏)를 통해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2.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그러나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게 하였다. 그 뒤 고종은 장성하게 되면서 직접 통치를 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민비와 노대신들은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하였다.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다스린다는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을 환수하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攘夷政策)과는 달리, 대외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국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구미 열강과도 조약을 맺는 등 적극적으로 개항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의 항구를 개항하여 개화 문명을 수용하였다.
    3.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그런데 이러한 개화 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대립이 점차 첨예화되어 갔다. 그러던 중 1881년 황쭌셴(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의 유입·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키는 등 민씨정부를 규탄하게 되었다.
    이때 안기영(安驥泳) 등은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일어났다. 그러나 고변(告變)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면서 고종은 안전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변법(變法)에 의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려는 개화당과 기존 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간의 계속된 알력은 결국,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시켰다. 그런데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 자주권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임오군란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이 구식 군대의 세력을 업고 정권을 장악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등 왕권은 큰 도전을 받았다. 또한 임오군란 이후 친청화(親淸化)한 민씨정권은 계속 국정을 논단하면서도 급격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였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 문제를 둘러싸고 교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 등이 동학도와 내통하면서 고종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으나 고변하는 자가 있어 무위로 끝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오경장 초기 은퇴하였던 흥선대원군은 일부 개혁 세력의 추대를 받아들여 궁중에 들어가서 고종으로부터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개혁 주도 세력과 일본 공사 등은 흥선대원군의 직접 간여를 꺼려 그의 실권은 거세한 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고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제정하여 자주 독립을 종묘에 서고(誓告)하였다.
    4. 대한제국의 수립
    일본은 청일전쟁 중에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과 이권 탈취에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고종은 점차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고,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게 되었다.
    이에 일본 공사(日本公使 : 三浦梧樓)는 친일 정객과 모의하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으며,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廢庶人) 조처까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민씨 복위의 조서(詔書)를 내려 빈전을 태원전(泰元殿)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이보다 앞서 1884년 러시아와 조러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러시아가 적극적인 접촉을 벌여오자, 고종은 당시 갑신정변 직후에 벌어지고 있던 청·일 양국군의 서울 진주와 충돌 등에 자극받아 난국을 타개하고자 러시아와 비밀리에 밀약을 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에 밀사를 거듭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침투공작을 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밀약공작은 안으로는 민씨정권과 밖으로는 청·일의 간섭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 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 정객과 내통하고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 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5. 일본의 침탈 야욕과 고종의 퇴위
    1898년 7월 안경수(安駉壽)는 현역과 퇴역 군인들을 동원한 황제 양위를 음모하였다. 또, 9월에는 정계를 농락하다 유배된 김홍륙(金鴻陸)이 독다사건(毒茶事件)을 일으키는 등 고종 신상에 거듭 위험이 닥쳤으나 무사하였다.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맹렬하게 개최되고 자유민권운동이 확산되어가자,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였다. 고종은 1900년 둘째 아들을 의친왕(義親王), 셋째 아들을 영친왕(英親王)에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淳嬪嚴氏)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장호익(張浩翼) 등이 황제 폐립을 음모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차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905년 11월 26일자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청국 즈푸(芝罘)를 경유하여 전 미국 공사이며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헐버트(Hulbert)에게 밀서를 보내어 미국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桂·Taft協定)을 체결한 뒤였기 때문에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 국정에 전반적으로 간여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마침내 한국 문제를 국제 정치의 마당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李相卨 : 전 의정부참찬)·이준(李儁 : 전 평리원검사)·이위종(李瑋鐘 : 주러조선공사관서기관)을 파견하였다.
    한편,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들 특사 활동에 원조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저서로는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이다.
    27대 순종유릉(裕陵)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207호             사적 제207호  
     

     
    종목 사적 제207호
    명칭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홍릉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211,286㎡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홍유릉관리소
    설명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사적 제207호             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홍릉(洪陵)-사적  제207호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홍릉(洪陵)-사적  제207호  

     

     

     

     

     

     

     

     

     

     

     

     

     

     

      

     

     

     

     

     

     

     

     

     

     

     

     

     

     

     

     

     

     

     

     

     

     

     

     

     

     

     

     

     

     

     

     

     

     

     

     

     

     

     

     

     

     

     

     

     

     

     

     

     

     

     

     

     

     

     

     

     

     

     

     

     

     

    https://youtu.be/T_kGG5kI0Bk

    https://youtu.be/Qg2tQ9XPuxI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