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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서울 정릉 (서울 貞陵)-사적 제208호-29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5. 30. 11:51
서울 정릉 (서울 貞陵)-사적 제208호-29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Queen Sindeok,second queen of King Taejo-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계유정난 발생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재위기간 동안 사림정치(士林政治)가 확립되고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초명은 균(鈞), 개명은 공(昖).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顯宗(1641-1674) 조선의 제18대 왕(재위 1660-1674). 효종의 아들이며 숙종의 아버지이다. 병자호란 이후 아버지 봉림 대군(효종)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 세자에 책봉되어 1660년 즉위하였으다. 재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나라 안이 어지럽고 국력은 약화되어 백성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한편, 두만강 쪽에 자주 침입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어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경기도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철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하였다. 이듬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 통혼을 금하는 등 치적이 있었으나,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는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였다.http://ko.wikisource.org/wiki/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결,능제도를 정비하여[국조상례보편][국조속오례의]를 펴냈다.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순조비 순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으나, 순조가 헌종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긴 조인영(趙寅永)도 정국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외척간의 협력과 경쟁이 계속되었다. 1841년부터 친정(親政)을 했으나 김좌근(金左根) 중심의 안동김씨와 조만영 중심의 풍양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계속되었고,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해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엮은 〈갱장록 羹墻錄〉·〈삼조보감 三朝寶鑑〉과 〈동국문헌비고〉·〈순조실록〉 등을 편찬하게 했고, 인재들을 근신(近臣)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조 사후 처음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운영했다.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208호 사적 제208호 종목
사적 제208호 명칭
서울 정릉 (서울 貞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299,574㎡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서울 성북구 정릉로 12길 103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정릉관리소 설명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의 자리는 정동에 있었으나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태종 9년(1409)에 옮겼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만들게 하였다. 무덤을 옮긴지 수백년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는데,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정릉이 회복되었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하여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의 무덤 제도는 고려왕릉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정릉의 사각명등석이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인 현재 정릉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을 규범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릉 → 서울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사적 제208호 사적 제208호 서울 정릉 (서울 貞陵) 서울 정릉 (서울 貞陵) #51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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