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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산리 석등과 석탑은 나를 다시한 번 일깨워 주었다.
    나의 문화재 이야기 2011. 4. 26. 11:11

    발산리 석등과 석탑은 나를 다시한 번 일깨워 주었다.

     

    지난 4월 17일 아침 대전 딸네집에서 군산의 문화재를 보기위해 집사람과 딸 사위 외손자와 함께 출발했다. 날씨가 좋다고 하지 않아서 걱정을 했지만 기우였다.
    미리 인터넷을 찾아 대전에서 출발 전북 군산의 문화재를 효과적으로 보기위해 순서를 정했다.
    그 첫번째가 불주사였다. 불주사에는 불주사대웅전(佛住寺大雄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불주사목조관음보살좌상(佛住寺木造觀音菩薩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불주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佛住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4호)이 있다.
    불주사에 도착하니 시각은 11시 50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절이다.

     

     

    대웅전 뒤 산에는 지면패랭이 똧이 활짝 피었다. 화사하다.
    영산전에서는 스님 독경소리가 불주사 경내를 감싸않는다. 영산전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12시 좀 넘으면 끝난다고 한다. 기다리자.

    절에계신 보살님께서 애기와 점심을 먹고 가란다.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절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던 나는 먹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기다렸다.

    12시가 넘자 목탁소리는 끝나고 신도 다섯 분이 나오신다. 여스님 한 분이시다.요사체 식사하는 곳으로 갔다. 밥, 쌈채소, 국, 쌈장, 등 맛이 좋다. 외손자도 잘 먹는다. 큰 딸기도 나오고 청포도도 나온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맛있는 식사였다. 맛도 있고 배도 부르다.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상주사였다. 상주사에는 상주사대웅전(上柱寺大雄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이 있다.

     

     

     

     

     

     

     

     

     

    상주사대웅전을 보고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임피향교 대성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이다. 향교 문이 닫혀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올라가다 보니 채만식 도서관이 있었다. 오래된 정자도 있고 초등학교 앞과 노성당 옆 보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노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32호)도 문이 닫혀 안을 볼 수가 없었다.

     

    '성당이 아니네........'

    나도 성당인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다.

     

     

    노성당은 철종 6년(1855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피유생들이 역대 수령들의 위패를 모시고 1년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유생들은 이곳에 모여 여가를 보내며 시와 노래를 즐기기도 한단다.현재는 어떻게 사용되는 지 알 수 없었고.다음 찾아 간곳은 임피역사(등록문화재 제208호)다.

     

     

     

     

    위로가면 익산 아래로 가면 군산 수많은 수탈 곡식을 실어날랐던 ........철길은 다 알고 있겠지. 씁쓸하다.

     

     

    전북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66-1의 탑동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을 보고 개정면에 있는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발산리 오층석탑(보물 제276호)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군산에 있는 보물 2점이다.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근처까지 갔다. 삼거리 길이다. 앞으로 직진하면 발산초등학교다. 초등학교 정문이다. 이정표에는 직진이란다. 당연히 우회전 했다. 초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돌았다. 네비게이션을 보니 점점 멀어진다. 차를 세우고 물었다. 돌아서 다시 가란다. 초등학교로 들어가란다.

     

     

    '학교로 들어갑니까?'

    '교사뒤에 있습니다.'

    '학교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를 돌려 초등학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천천히 초등학교로 들어섰다. 운동장에는 족구가 한창이었다.

    뒤뜰로 가니 낮은 울타리로 많은 석물을 구분하고 있었다. 꽤 많다. 석물이 무려 31점이다. 어찌 초등학교에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한자리에

     

    있을까? 궁금했다.

     

     

     

     

     

     

     

     


    발산리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 중 유일하게 기둥에는용의약동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화사석면은 각이 뚜렷하지 않은 둥그스름한 모습에 마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상이 조각된 특이한 석등이다. 석등은 절에 있어야 하는데.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물 제 276호로 지정되어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85호이다.

     

     

     

     

     

     

    31개 석물 중 3개만 지정문화재다. 28개의 석물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안타깝다. 제자리에 있지도 못하고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고향을 그리는 문화재가 아닌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역사가 한스럽다.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지만 약탈될뻔했던 문화재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나마 다행인가?

     

     

    석등 : 원래는 완주지역에 세워져 있던 석등으로, 일제강점기에 지금의자리로 옮겨 세웠다.

    오층석탑 : 원래는 완주(完州)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육각부도 : 1903년 군산에 농장을 개설한 일본인 시마따니 야소야라는 사람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하며

     

     

    문화재청 설명자료에 부드럽게 설명했다. 우리가 우리 뜻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수탈하기 위해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완주지역, 완주 봉림사터, 위치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석등 :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일제시데에 일본인 농장이었던 이곳 발산초등학교 뒷뜰로 옮겨왔다.

    오층석탑 : 원래는 완주(完州)군 고산면 삼기리봉림사터에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 농장이었던 이곳으로 옮겨졌다.

    육각부도 : 1903년 이자리에 농장을 개설한 일본인 시마따니 야소야라는 사람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한다.

     

     

    안내판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석등과 석탑은 원래 완주군 고산면 봉림사터에 있던것으로 일제때 이곳에 넓은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따니 야소야]라는 일본인이 옮겨다 놓은 것이라 한다. 1945년 우리는 독립했고 그 농장은 폐쇄되었으며 그 자리에 1947년 발산 초등학

     

    교가 들어선 것이다.

     

    29개 석물(문화재)은 어디있었던 것을 옮긴 것일까?

    완주군 고산면 봉림사터는 ?

     

    경기 화성시 북양동 642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237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호근동 186

    광주 광산구 신촌동 883-9

    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 산139-9

     

     

    경북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1429

    경남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54-7

    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산139-9

    경북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 914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2372

     

     

    전남 여수시 오림동 291-5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1271-3

    봉림사지 : 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165

    봉림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816-2

    봉림사지 : 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 18

     

     

    전국적으로 봉림사는 12개가 검색되었고 창원 의창구에만 3개가 검색되었다. 봉림사지도 창원 의창구에서 2개가 검색되었다.


    완주군에는 봉림사도 봉림사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밝혀지지않은 봉림사지가 있는가 보다.

    완주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삼기리를 확인했다.

     

     

    삼기리(三寄里)
    하삼(下三寄. 前三寄) 부분명-삼기정, 백현, 산머리
    하삼기는 삼기정 마을을 위치에 따라 상하 전후로 나눈 이름이고, 삼기정은 현감 최득지가 세운 정자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그 정자 근처의 경치가 좋기로 알려졌다. 현재 정자는 없고 유허비만 서 있다. 백현은 하감기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개에 있고, 뒤에 잣나무가 있으니 ‘잣고개→백현’이다.
    - 종암(鐘岩) 부분명-기린리(麒麟里)
    종암은 마을 아래에 종과 같은 큰 바위가 있다. 종암을 ‘말바위’라고도 하는데 ‘말’은 크다는 말이다. 기린리는 기린봉 밑에 있다.
    - 상삼기(上三寄. 後三寄) 부분명-봉림동(鳳林洞)
    봉림동은 봉림산 밑에 있고, 봉림산에는 봉림사가 있었다.

     

     

    http://tour.wanju.go.kr/board/view.sko

    상삼기와 후삼기의 부분명으로 봉림동이 있으며 봉림동은 봉림산 밑에 있고 봉림산에는 봉림사가 있다고 되어있다.

     

     


    완주군 고사면 행정지도

     

     

     

     

     

     


    봉림이라는 마을 오른쪽이 봉림산일까? 그럼 그 어디가 봉림산일테고 그 어딘가에 봉림사가 있었을 것이다.

     

    지형상 고산천 왼쪽은 아닐 것이다.

    어딘지는 알 수 없고

    이곳에서 군산 개정면 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될까?

     


     

    직선거리로 약 40킬로미터다.

    현재의 거리로는 얼마나 될까?

     

     

     

    1930-40년대는 지금과 같은 도로가 아닐진대 60킬로미터는 훨씬 더 되리라.


    그럼 이곳에서부터 단순히 정원을 꾸미기위해 그 먼거리를 옮겨왔을까? 트럭으로 달구지로? 어떻든 욕심이 많은 일본인이다.

    다시 발산초등학교를 살펴보자

    석등, 오층석탑, 육각부도를 보았으나 문화재 또 하나가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르겠다.

    군산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群山 開井面 舊 日本人農場 倉庫) (등록문화재 제182호)다. 족구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교문을

     

    나서니 바로 면사무소다. 그곳 여직원을 만났다.

    '일본인 농장 창고가 어디있어요? 모르겠네요'


    '그곳에 가면 있어요.유치원 건물 뒤에요'

    다시 들어가 보았다. 건물 뒤로. 아 거기에

     

     

     

     

     

     

     

    학교 유치원 건물 바로 뒤다.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등록문화재도 문화재일텐데 학교 건물로 막아버렸다.

    이 건물은 무슨 건물이었을까? 농장창고? 농기구를 두기위해서 이런 건물을 ? 수확한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서 이런 건물을? 분명 아닐 것이

     

    다. 앞에는 육중한 철문, 철창살,지하

     

    1.[군산 발산초등학교 후정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숨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소야'가 세운 금고건물과 그가 모아놓은 우리 문화재의 약탈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역사의 상흔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제는 곡창지대인 호남에 농장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앞세워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쌀들을 군산항을 통하여 약탈해 가는데 몰두하였던 바 지금도 군산지역에는 당시의 슬픈 그림자가 많이 남아있다.

    그 중 '시마따니 야소야'는 부근의 역사 유물과 그림, 서화 등의 수집에도 열을 올렸는데 일제의 패망과 함께 남겨진 유물들은 지금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발산초등학교 후정에 놓여진 채 빼앗기고 찢겨진 역사의 슬픈 현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


     

    2.[군산향토문화유산 4호

    이 건물은 일제시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소야'가 1930년대에 세운 금고용 건물로 시마따니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물에 관심을 가지고발산리 석등 (보물 234호), 5층 석탑(보물 276호) 등을 불법 수집하였던 인물인데 이 건물은 시마따니가 자신의 수집품 중 서화나 도자기 등 귀중한 골동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건립한 금고용 건물로서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한 우리 문화재 약탈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지 가치가 있다.

    건물은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고 창문은 쇠창살과 철판으로 이중잠금장치가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 때문에 한국전쟁 때에는 군산에서 주둔한 인민군들이 우리 지역 우국지사들을 감금하는데 사용하였다.

    일제시대 만들어 졌다는 콘크리트 건물과 철제 금고의 견고함에 놀라움만....]

    http://jbgokr.tistory.com/48]

    3.[◇…금고, 석등, 석탑이 있는 학교 뒤뜰

    ////////////////////// 이 작은 박물관은 일본인 시마따니 야소야, 그의 수집품이었다. 발산리의 땅을 사들여 농장을 운영한 그는 전국을 돌며 옛 미술품, 골동품, 석조예술품을 모아 이곳에 가져다 놓았다.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다. 교실은 쌀 창고였고 왼쪽에 새로 지은 건물은 농장 사무실이 있던 자리였으며 운동장은 나락 건조장이었다. 농장 사무실 뒤에는 금고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견고한 콘크리트 박스. 금고로서는 거구이며 금고의 기능에 맞게 평범하다. 이 속에, 농장의 서류와 각종 보물들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창살로 휑하게 뚫린 반 지하의 방이 음산한 내부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이 금고에 '반동분자'를 수감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조선에 살고 싶어 했고 해방 후 농장을 지키기 위해 귀화를 신청했지만 강제로 귀국선에 올라야 했다. 금고는 텅 비었고, 가지고 가지 못한 것들, 이고, 지고, 가기엔 버거운 것들이 지금 남아있는 것이다. 이곳은 자꾸만 소리로 따라온다. 공허하고, 처참한, 소름이 돋는 소리로. 학교가 된 것은 1947년, 아이들의 명랑한 소리로 채워진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건만 오래된 것들이 내는 소리는 끈질기다.]


    http://www.yeongnam.co.kr/yeongnam/html/weekly/leisure/article.shtml?id=20090807.010420817410001

    4.[시마따니 야소야(일본 야마구찌현 출신) 이 자도 1903년에 농장 문을 연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적극적으로 자국민의 해외진출을 권장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일인들이 자국정부의 권장 내용을 확인코자 조선으로 대거 진출한다. 돈벌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팔도를 휘젓고 다닌다.

    시마따니의 수집품들이 남아 난 것은 이 자가 운영하던 농장을 소유한 채 조선 귀화를 희망했다고.협상을 하다가 틀어지자 일본으로 떠나는 마지막 배를 군산이 아닌 부산에서 타고 떠나는 바람에 수집했던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게 되었던 것.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일본으로 실려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곳에도 어디서 가져 왔는지 확인 하지 못하는 5층석탑과 부도 등이 발산초등학교(시마따니 농장 중심 자리)뒷편에 전시되어 있다.
    시마따니 야소야 창고. 일제 패망 후 이 창고를 열었을 때 지층과 2층에 서화와 유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고.]
    http://blog.ohmynews.com/aprial/66268

    5.[시마다니는 원래 일본에서 주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온 것은 술의 원료인 쌀을 찾아 온 것이다. 당시 한국 논의 가격은 일본보다 10% 싼 데 비해 소출은 4배나 더 났다. 많은 일본인들이 시마다니처럼 쌀을 찾아 한국으로 왔다.”
    일본인이 조선에 소유한 토지 총면적 중 31.6%가 군산 지역에 있었으며 그 중 93.4%가 농경지였다는 것은 우리 농민들이 좋은 논을 대대적으로 침탈당하고 노예와 같은 소작농으로 전락했음을 드러내는 것.
    일본 헌병들 책상 위에서 지도 위에 연필로 찍찍 그어진 속칭 ‘연필도로’들이 한국의 곡물을 일본으로 쉽게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계획선에 걸리면 논이건 밭이건 집이건 아무 보상 없이 그대로 헐려나갔으며 게다가 신작로 건설은 인근 주민들의 강제노역으로 이루어졌다. 항구로 내리닿는 도로와 철로들은 그대로 철저한 수탈의 역사인 것.
    “1930년대엔 200만섬의 쌀이 군산항구에서 일본으로 보내졌다. 우리나라 쌀 총생산량의 50% 이상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수확량의 60∼70%를 소작료로 빼앗긴 우리 농민들은 만주의 콩깻묵과 값싼 베트남 안남미를 들여다가 목숨을 연명시켰으니 일본인들에게 우리 농민들은 쌀을 생산하는 기계나 다름없었다.”

    시마다니와 같은 일본인들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쌀을 실어냈을 뿐만 아니라 닥치는 대로 문화재를 끌어 모았다 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유물을 자신의 저택 장식용으로 사용하려고 깊은 산사의 유물까지도 약탈했다.”

    그렇게 해서 수집된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유산이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발산초등학교에 지금 남아 있는 석조물들 역시 정원 장식품으로 일본으로 보내지기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 각지에서 군산으로 ‘끌려온’ 유물 중 일부였던 것.
    일본인 배에 실려 바다 건너 먼 길을 포로처럼 끌려간 수많은 유물들 중 다시 그 바다를 건너와 본디 제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유물은 얼마나 될지.
    남인희 기자
    namu@jeonlado.com]
    http://www.jeonlado.com/v2/ch01.html?number=5780

    그렇다 이 창고는 수탈한 문화재를 보관하는 수탈고 였다. 가슴이 쓰리다. 선조들의 피땀어린 훌륭한 문화재가 그곳에 갇혀있었다.
    시마따니(島谷)
    야소야(일본 야마구찌현 출신)는 1903년에 농장 문을 열고 1938년에는 1,385정보를 소유하고 1,607인의 우리 농민을 소작인으로 두었다.

    농사는 짓지않고 돌아다니며 귀중한 문화재만 약탈 이 창고에 두었을 것이다. 많은 소작인을 시켜 문화재를 옮겨왔을 것이다. 소작인은 수탈하는 일본인의 손발이었다. 문화재만 약탈했는가? 노동력도 착취했다.

    무수히 많은 문화재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것이다. 찾아올 수는 없을까? 하나하나 다 찾아와야겠다. 문화재 환수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음도 몸도 무겁다. 피곤하다. 수탈의 현장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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