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b of King Munjong and his wife Queen Hyeondeok-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5대 문종(재위 1450∼1452)과 현덕왕후의 권씨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왕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동구릉-현릉
이향
1450~1452
1414(태종 14)∼1452(문종 2). 조선 제5대 왕.
재위 1450∼1452.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 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각종 질환으로 인해 1437년 일치감치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群臣)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했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했으며, 1445년부터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문종은 즉위하기 전부터 실제적인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 시대의 정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해 약간 위축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종친 세력의 심상하지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한 언관(言官 : 臺諫)의 종친에 대한 탄핵 언론으로 상호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 언관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斥佛言論)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왕의 호불적(好佛的) 경향에 대한 유신(儒臣)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각종 불교 행사와 내불당(內佛堂)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유자적(儒者的)인 언관(言官)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언관의 언론은 왕권이나 그 밖의 세력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求言)했고, 언로(言路)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朝臣) 6품 이상에게 모두 윤대(輪對)를 허락하였다. 또한 비록 벼슬이 낮은 신하일지라도 부드럽게 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문종 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 東國兵鑑≫·≪고려사≫·≪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 大學衍義註釋≫ 등이 있다. ≪고려사≫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고려국사 高麗國史≫ 이래 여러 차례 개수(改修)·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해 1451년(문종 1)에 완성을 본 것이다.
또한 기전체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 왕조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문화의 정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1445년에 10사(司)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하였다. 문종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陣法)을 편찬하는 등 군정(軍政)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제시했고, 재위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문종은 유학(儒學 : 性理學)뿐 아니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및 산술(算術)에도 정통했고, 예·초·해서(隷·草·楷書)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 재위 2년 4개월만에 39세로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 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이고, 묘호는 문종(文宗)이며, 능호는 현릉(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으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등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북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
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척결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3호
사적 제1973
종목
사적 제193호
명칭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현릉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969,675㎡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동구릉관리소
설명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동구릉 → 구리 동구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