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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orld Cultural Heritage-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건원릉-사적 제193호-1
    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5. 28. 10:57

    World Cultural Heritage

    ( )

    - 건원릉-사적  제193호 ①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King Taejo-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1대 태조(재위 1392∼1398)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동구릉-건원릉 이성계 1392~1398
    1335(충숙왕 복위 4)∼1408(태종 8). 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성계(成桂)이다. 자는 중결(仲潔)이다. 호는 송헌(松軒)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 영흥)에서 태어났다.
    자춘(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다.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정월 친병(親兵:私兵)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고, 가장 먼저 입성해 큰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崔濡)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왔다. 이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이 무렵 여진족이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이성계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뒤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 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했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했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다. 이듬 해 함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대파했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 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정치·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 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다.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했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했다.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 : 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3년 9월에 착공해 1396년 9월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 : 北門)·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숭례문(崇禮門 : 南大門)·돈의문(敦義門 : 西大門)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 등을 지어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법제 정비에도 힘써, 1394년 정도전(鄭道傳)≪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崇儒斥佛政策)을 시행해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에 방원(芳遠 :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했다. 곧이어 방석·방번(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해 방과(芳果)로 결정했다.
    태조는 방석·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자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제로 책립되었다. 곧이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함주(咸州 : 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의탁했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74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으며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편찬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계유정난 발생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으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등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북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 이호 1649~1659 북벌운동 준비 시행하려 하였으나 사망으로 좌절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

     

     

     
    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척결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3호             사적 제1973  
     

     
    종목 사적 제193호
    명칭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건원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1,969,675㎡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동구릉관리소
    설명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동구릉 → 구리 동구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건원릉
     
      사적 제193호             사적 제1973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건원-사적 제193호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건원-사적 제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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