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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Cultural Heritage -여주 영릉(寧陵) (驪州 寧陵)-사적 제195호-14문화재/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2013. 5. 3. 13:24
여주 영릉(寧陵) (驪州 寧陵)-사적 제195호⑭
World Cultural Heritage Tomb of King Hyojong and his wife Queen Inseon-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계보 1대 태조 이성계 1392~1398 왕조 개창 2대 정종 이방과 1398~1400 다시 수도를 한양에서 개경으로천도 3대 태종 이방원 1400~1418 4대 세종 이도(이원정) 1418~1450 훈민정음 창제및 조선전기의 최전성시대 5대 문종 이향 1450~1452 6대 단종 이홍위 1452~1455 계유정난 발생 7대 세조 이유 1455~1468 훈구파 득세 8대 예종 이황 1468~1469 9대 성종 이혈 1469~1494 경국대전 집필 완료 10대 연산군 이융 1494~1506 조선왕조 개창 100주년 훈구와 사림파 충돌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발생 사림 타격을입다. 11대 중종 이역 1506~1544 중종반정, 기묘사화가 일어나다. 왕실 외척 윤씨가 소윤 대윤으로 나뉘어져 반목 을사사화 발생 12대 인종 이호 1544 역대 재위왕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지다 . 13대 명종 이환 1545~1567 14대 선조 이균 1567~1608 조선 개국 200주년 임진왜란 발발 그외 정여립 모반사건 이몽학의난등으로 조선사회의 변동이 일어남 15대 광해군 이혼 1608~1623 후금이 세워지다 후금과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 대동법 활성화 북인의 득세 16대 인조 이천윤 1623~1649 북인 몰락 인조반정이일어나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침략 병자호란발발 주화파와 주전파가 대립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마지막으로 패배 17대 효종여주 영릉(寧陵) 이호 1649~1659 1619(광해군 11)∼1659(효종 10).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호(淏)이다.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다. 1626년(인조 4)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 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곁에서 형을 적극 보호했다. 청나라가 산하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다. 그 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해 그를 보호하였다.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하이관, 금주위(錦州衛) 송산보(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었다.효종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에 밀고해 북벌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 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 강경책을 폈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이 기회를 이용해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 : 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세력을 잃음으로써 이듬 해부터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즉,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했다.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600여 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 명으로 증액하려 했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해 실패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진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였다.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해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서울 외곽의 방위를 크게 강화하려고 원두표를 강화도로, 이후원(李厚源)을 안흥으로,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 : 경기도 부천시)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했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했다.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H.) 등을 훈련도감에 들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해 염초(焰硝) 생산에 전력했다. 뿐만 아니라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자주 참가해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다.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能?兒廳)을 설치해 무장들이 강습권과(講習勸課)하도록 했다. 이듬 해 정월에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 ; 검은 두루마기의 뒤를 터서 짧게 만든 옷)로 바꾸어 행동을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 어린 군비 확충에 노력했다.그러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해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효종의 군비 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해져, 북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군비 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다시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다. 전세(田稅)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시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군비 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전(行錢)의 유통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 데 노력했다.문화면에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했다. 태음력의 옛 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 시간을 계산해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1654년≪인조실록≫을, 이듬 해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 간행했다. 그리고 공주목사 신속(申?)이 엮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656년에는 전쟁 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 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 警民編≫을 간행하였다. 이듬 해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해 간행했다.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朝臣)들과 뜻이 맞지 않는 괴리현상이 일어나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묘호(廟號)는 효종이다. 능호는 영릉(寧陵)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874
18대 현종 이연 1659~1674 제1차 2차 예송논쟁 발생 남인과 서인의 반목으로 아수라장 19대 숙종 이순 1674~1720 조선 개국 300주년 경신환국 서인득세 기사환국 남인득세 갑술환국 서인득세 로 정치적 판도가 세번 뒤엎어짐 20대 경종 이윤 1720~1724 연잉군이 최초 왕세제로 등극 21대 영조 이금 1724~1776 탕평책 실시 법전과 예법을 재정비 최장수 왕으로 등극 노론 척결 22대 정조 이산 1776~1800 조선개국 400주년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주도 탕평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시 화성천도와 장용영 준비함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모색 그외 업적이 많다. <천주교가 학문형식으로 들어오다. 23대 순조 이공 1800~1834 외척가문의 도래 시파 벽파로 소론분열 24대 헌종 이환 1834~1849 25대 철종 이원범 1849~1863 26대 고종 이희(이명복) 1863~1907 조선개국 500주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및 연호사용 27대 순종 이청 1907~1910 경술국치,일본에 합병당하다. 사적 제195호 사적 제195호 종목
사적 제195호 명칭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驪州 英陵과 寧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
2,008,536㎡
지정일
1970.05.26 소재지
경기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69-50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유,세종대왕유적관리소 설명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영릉·녕릉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효종
인선왕후
사적 제195호 사적 제195호 여주 영릉(驪州 寧陵)-사적 제195호 여주 영릉(驪州 寧陵)-사적 제195호 '문화재 > 내가 본 조선 왕릉(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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