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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경기도 기념물 제60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5. 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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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기념물 제60호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60호

    명칭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

    1 기

    지정일

    1981.07.16

    소재지

    경기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89-4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사유,이태경

    설명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청백리의 한 사람이던 쌍백당(雙栢堂) 이세화(1630∼1701) 선생의 묘소이다.

    효종 8년(1657)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를 폐(廢)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반대를 하다가 정주로 유배되었다. 뒤에 인현왕후의 복위 문제를 맡으며 다시 조정에 올라왔다. 이후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두루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충신의 상징인 정문(旌門)을 고향에 세우고 영의정의 관직을 내렸다.

    묘는 부인과 합장하여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묘 앞에는 묘비를 세웠으며 그 아래 좌우에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놓여 있다. 묘소의 진입로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남구만이 글을 짓고 오태주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60호 경기도 기념물 제60호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이세화선생묘 (李世華先生墓)

     

     

    이세화(

    1630(인조 8)∼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그 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그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갑술환국 후 1694년 4월 대사간·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 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개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칠정(七井). 병조정랑 계록(繼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이재(以載)이다. 큰아버지 장릉참봉 희재(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선정되었다. 

    그 뒤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풍계(豊溪)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652년(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장령 등을 거쳐 황해도·평안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 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고 형간(刑諫)하였다.

    다음 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저술활동]
    저서로는『쌍백당집(雙栢堂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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