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북평해암정 (北坪海岩亭)-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3. 2. 14:52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종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명칭

    북평해암정 (北坪海岩亭)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

    1동

    지정일

    1979.05.30

    소재지

    강원 동해시 추암동474-5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삼척심씨종중

    설명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 짓고,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언광이 다시 지었다.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는데, 고려말의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다가 권력을 잡고있던 간신배들이 마음에 들지않아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왕은 그를 말렸으나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결국 허락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모두 4척 정도의 높이까지 벽을 만들고 모두 개방하였다.

     이곳에는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들러 남긴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라는 글이 남아 있다.
     

     

     

     

     

     

     

     

     

     

     

     

     

     

     

     

     

     

     

     

     

     

     

     

     

     

     

     

     

     

     

     

    심씨(沈氏) - 본관:삼척(三陟) 시조 심동로(沈東老)는 고려 말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예의판서(禮儀判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등을 역임하고 진주군(眞珠君)에 봉해졌다. 다만 《삼척심씨세보(三陟沈氏世譜)》에 따르면 시조의 선계는 문림랑(文林郞)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한 심적충(沈迪冲)의 아들로 좌승선(左丞宣)을 역임한 심후(沈侯)로 전해지고 있지만 중간 세계는 확실하지 않다. 이에 후손들은 신동로를 시조로 하고 삼척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심동로(沈東老)

    고려 때 문신. 본관은 삼척(三陟). 초명(初名)은 한(漢). 호는 신재(信齋), 문림랑군기주부(文林郞軍器主簿) 적충(迪沖)의 현손(玄孫)이고 검교(檢校) 수문(秀文)의 아들. 일찍 등과(登科)하여 직한림(直翰林)에 있다가 부모가 늙어 지방수령이 되기를 원하여 1352년(公民王 1)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내서사인(內書舍人)이 되었다. 고려말 해이된 정사를 바로 잡으려 하다가 권문귀족측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고향 삼척(三陟)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더니 왕은 그 뜻을 높혀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하여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렸다. 목은 이색(李穡)이 학사승지(學士承旨)가 되었을 때 왕에게 말하기를 "沈東老는 학식이 신보다 났고, 나이도 신보다 많으며 벼슬길에 오르기도 먼저니 신의 직책을 그에게 내리십시요"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했다. 김구용(金九容)이 안사(按使)가 되어 삼척에 왔을때 동로(東老)를 찾아 그가 거처하는 집에 신재(信齋)라는 편액(扁額)을 써서 걸었다. 삼척에 은거한 뒤에는 날마다 죽서루(竹西樓)와 해암정(海岩亭)에서 풍월을 읊는 것으로 일을 삼고 한편 사람에게 글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년에 조정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와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했다. 예빈시승(禮賓侍丞) 이구(李球)가 시를 지어 동로(東老)에게 준 시에 [三陟官樓是竹西 樓中佳客沈中書 如今白首能詩酒 暇日相遊爲說余]라 했다.

     

    http://www.woogaelee.org/seoul/board.php?board=people&command=body&no=80

     

    심언광(沈彦光)에 대하여

     

    심언광(沈彦光)
    1487(성종 18)∼1540(중종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사형(士烱), 호는 어촌(漁村). 예조좌랑 준(濬)의 아들이며, 찬성 언경(彦慶)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그뒤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면서 문명을 날려, 지평·정언·장령·홍문관교리·집의 등의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언관을 역임하면서 국방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하였고,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하여 심정(沈貞)을 비롯한 권간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1530년 대사간이 되어서는 형 언경과 함께 김안로 (金安老)의 등용을 적극 주장, 실현시켰다.
    그러나 김안로가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붕당을 조직하고 대옥(大獄)을 일으켜 사림들을 모해하자, 비로소 지난날 자신의 추천행위를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안로가 그의 외손녀를 동궁비로 삼으려 하자 이를 질책하니,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1536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김안로의 비행을 비판하자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김안로와 그 일당이 축출되자, 우참찬에 올랐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大尹) 일파가 집권하면서 향배가 바르지 않다고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복관되었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4275

     

    '草合雲深逕轉斜(초합운심경전사), 풀은 구름과 아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