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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만묘 (趙正萬墓)-인천광역시 기념물 제7호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2. 27. 18:21
조정만묘 (趙正萬墓)-인천광역시 기념물 제7호
종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7호 명칭
조정만묘 (趙正萬墓)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
1 기 지정일
1990.11.09 소재지
인천 남동구 도림동 산46-3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임천조씨오제공파종중 설명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정이(定而) 조정만(1658∼1739) 선생의 묘소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숙종 7년(1681)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는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오재집』이 있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와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 근처에 이의현이 짓고 김진상이 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유난히 솜방망이가 많았다.
조정만(趙正萬,
~
)조정만(趙正萬,
~
)은
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
는 정이(定而)이다.
(
7년)에
에 장원 급제하여
에 입학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의 저격수이며
의 지도자
(金尙魯)는 그의 후처 전주이씨 소생 다섯째 사위였다.어려서
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
7년)에
에 장원 급제하여
에 입학하였으며, 1688년
폐출사건 때 파직당했다가 1694년
가 복위되면서 금부도사로 채용되었다. 이후 공조(工曹)와 호조(戶曹)의 낭관, 제용감(濟用監) 판관, 군자감 판관(判官), 상의원 첨정,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
정,
정 등을 거쳐 지방관으로는 강서현령(江西縣令),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광산현감(光山縣監), 황해도 안악군수(安岳郡守), 청송부사과 성천부사, 나주(羅州), 능주(綾州), 청주(淸州), 양주(楊州), 경상도 상주(尙州) 등의 목사(牧使)등을 지냈다.
의 3급수설 당시
의 공격을 받고
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영조 즉위후 복권하여
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정(軍資監正)으로 옮겨 제수되었다가 다시 지방관직인 경기도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제수하였다. 다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판결사,
,
르르 거쳐, 장릉(長陵 :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의 능)의 표기(表記)를 써서 올려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됐다.그 뒤
(漢城府左尹),
(戶曹參判) 겸 부총관(副摠管) 동지의금부사 등을 지내고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장에서 영조에게“알욕존리(遏慾存理 : 욕심을 막고 천리를 보존함)”의 문구를 들어, 반복하여 경계할 것을 진술하자, 영조가 귀를 기울여 들으시곤, 공에게 “알욕존리(遏慾存理)” 4자를 써서 올리라하시며, 특별히 호랑이 가죽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손수 유지(諭旨)의 뜻으로 “일세용탄(一世聳歎)”이라는 휘호를 선물로 받았다.
특별히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고
,
,
를 거쳐 정헌대부로 승진하여
지사에 이르렀다.그는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와
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오재집』이 있다.묘소는
에 있으며, 임천 조씨 오제공파 종중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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