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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제두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2. 24. 17:54

    정제두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종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

    명칭

    정제두묘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수량

    3,900㎡

    지정일

    2007.02.20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62-6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정시종

    설명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 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1649년(효종1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낸 뒤 다시 사직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重臣)의 천거로 30여 차례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숙종 때 주부(主簿) ·호조참의 ·회양부사(淮陽府使) ·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 ·이조참판, 영조 때 우찬성(右贊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등을 잠시 지냈을 뿐,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61세에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하곡(霞谷)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하여 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심육(沈?),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이 그의 문인으로 학풍을 이었다. 그가 속한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강화학파라 불리게 되었다. 양명학을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는 정제두를 시작으로 한말 이건창, 이건승을 이어 박은식과 정인보에게로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5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되어 있고, 그 앞에 원형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신대우(申大羽)가 글을 짓고,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정제두 글씨

     

    정제두 [鄭齊斗]는

     

    1649(인조 27) 서울~ 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했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유성(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상징(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어려서 이상익(李商翼)에게 배웠고, 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다. 윤증(尹拯)에게도 배웠으며, 최규서(崔奎瑞)·최석정(崔錫鼎) 등과 사귀었다. 1668년(현종 9)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무렵부터 공소(空疎)에 빠진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에 심취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4년 공조정랑을 잠시 지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자 중신들이 다투어 천거하여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1689년 안산(安山)에 옮겨 살았는데, 이때 양명학에 더욱 몰두했다. 이 시기에 저술된 〈학변 學辨〉·〈존언 存言〉에는 양명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심성학(心性學)이 심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1709년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 살았으며, 숙종 때 호조참의·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성균좨주에 임명되었다. 1726년 이정박(李廷撲)이 그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우참찬,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9j139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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