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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재및육영루(花齋및毓英樓)-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16
    문화재/내가 본 문화재자료 2019. 3. 3. 12:11

    화재육영루(花齋毓英樓)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16호

     

     

     

     

                   
     

     

    종목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16호

    명칭

    화재육영루(花齋毓英樓)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

    2동(棟)

    지정일

    2002.02.14

    소재지

    경북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606번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영덕군

    설명

    화재 및 육영루는 영양남씨 자손들이 송정 남수(1395∼1477)의 덕을 기리어 건립한 것으로, 화재는 남수를 제사 지내기 위한 재실이며 육영루는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강당이다. 산을 등지고 왼쪽에 화재가 있고 오른쪽에 육영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수는 조선 태종 때에 벼슬길에 올라 용담현령까지 지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문을 닫고 사람을 대하지 아니했다 하여 단묘유신(端廟遺臣)이라 추앙을 받았다고 전한다. 현재 영양남씨의 90%가 그의 자손이라 한다.

    화재는 경사진 대지 위에 정면 5칸·측면 5칸 규모로 세워졌다. 건물의 평면은 ‘ㅁ’자형으로 각리언곡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8호)와 비슷하다. 앞쪽 대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고방과 부엌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2칸통의 온돌방이 위치하고 있다. 온돌방 뒤쪽으로 우익사 3칸이 이어져 있다. 온돌방에 이어서 고방이 자리하고 그 뒤쪽으로 육영루와 통하는 통례칸이 있다. 부엌과 연결되는 좌익사는 온돌방 한 칸과 2칸통의 온돌방이 수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뒷부분은 가운데 3칸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다. 상부가구는 장식성 요소가 전혀 없는 3량구조법이며 벽체는 모두 시멘트 몰탈로 마감되었다.

    화재 오른쪽에 자리한 육영루는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정자형 건물이다. 대지의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으나 전면은 완전한 중층형으로 꾸몄다. 퇴칸 전면에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정자의 높직한 맛을 주었으며, 상부가구는 판대공을 세운 5량구조이며 팔작지붕을 얹졌다. 외벽과 기단은 화재와 마찬가지로 시멘트 몰탈로 마감되었다.

    ‘육영루기(毓英樓記)’에 의하면 육영루는 조선 영조 50년(1774)에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화재의 안대청 상부 상량문에 의하면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재 및 육영루는 비록 중건된 건물이지만 향토의 문화유산이라는 입장에서 가치가 크다.

     

     

     
     

     

               

     

     

     

     

     

     

     

     

     

     

     

     

     

     

     

     

     

     

     

     

     

     

     

     

     

     

     

     

     

     

     

     

     

     

     

     

     

     

     

     

     

    송정 남수(1395∼1477)

    본관은 영양, 호는 송정, 세종 대 직장, 주부, 사헌부 감찰, 용담현령을 역임하였으며, 울진으로부터 창수면 인량리에 옮겨 살았으다. 중랑장 남영번의 넷째 아들이자 만호 남호의 아우이다. 1417년 과거에 등재하여 1425년에 서사(筮仕)에 올랐고,1439년에 통찬(通贊)에 올랐으며, 1440년에 승훈, 1444년에 감찰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용담군수가 되었다. 용담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 단종의 손위(遜位)를 전해 듣고, 1448년 봄에 고을에 돌아와 단종 사당에 문묘하였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성균전적겸남학교수인 헌납 김대가 남수의 정절을 칭찬하여 "어물어물하지도 않고 굴하지도 않는 것은 순수한 덕성이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누워 쉰 것은 절의를 숭상함이요, 끝까지 옛 주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라 하였다.남수의 활동사항은 장릉사보(莊陵史補)와 매월당집 등 에 기록되어 있다.

    http://cafe.daum.net/byhdg/BGLx/787?q=%EC%B2%98%EC%9D%B8%EB%8B%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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