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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하조대 (襄陽 河趙臺)-명승 제68호문화재/내가 본 명승 2018. 12. 15. 18:37
양양 하조대 (襄陽 河趙臺)-명승 제68호
종목
명승 제68호
명칭
양양 하조대 (襄陽 河趙臺) 분류
자연유산 / 명승/ 역사문화명승
수량
134,825㎡
지정일
2009.12.09
소재지
강원 양양군 현북면 조준길 99, 일원 (하광정리)
시대
소유.관리
국(국방부)외,양양군
설명
양양 하조대는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암석해안으로,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동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은둔하며 혁명을 도모한 곳이라 하여 하조대라 명하였다는 등 많은 설화와 전설이 담겨있는 역사문화 경승지이다.하륜(河崙)과 조준(趙浚)하륜(河崙)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또한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도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더욱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조선 건국 초기, 새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시기에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을 거친 뒤에 왕위에 올랐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정치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의 뒤에는 지략가이자 실천가인 하륜(河崙)이 있었다. 하륜은 이방원이 마음껏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세심하게 계획했던 인물이다.
하륜의 본관은 진주로, 고려 후기 순흥 부사를 지낸 하윤린(河允潾)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에 열아홉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 검열, 감찰규정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그 뒤로 고공좌랑, 사헌지평, 보문각 직제학, 성균대사성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하지만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다가 양주로 추방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륜이 리더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부터이다. 물론 초기에는 정도전(鄭道傳)과 사이가 좋지 않아 좌천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태종 이방원과의 만남이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5700001
조준(趙浚)
조준(趙浚, 1346년 ∼ 1405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 혁명가(革命家)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의 부군 조대림(趙大臨)의 아버지이다.
1371년(공민왕 21년) 음서로 문관 관직에 천거되었다가 1374년(공민왕 24년)에 함과에 급제, 공민왕 시대와 우왕 시대에 문관(文官)과 무관(武官)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384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났다.
1388년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관직에 전격 복귀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 등을 거쳐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 밀직사사(密直司事) 겸 대사헌의 지위로써 문하시중 조민수(曺敏修)를 탄핵하여 축출시키고 이어 1389년 창왕 폐위 및 공양왕 보위 추대에도 개입하였다. 3년 후 1392년(공양왕 4년)에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의기상투(意氣相投)하여 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와 이재에 밝아 전제 개혁안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개편하였다. 정치적으로 동반자였던 정도전과는 요동정벌 문제로 결별한 뒤, 제 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조선 시대 초기를 통하여 그는 도통사·문하우시중·좌정승 등을 거쳐 1403년 음력 7월 16일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조준을 가리켜 항상 조정승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조대림은 경정공주와 혼인하여 평녕군(平寧君)에 봉해지는 등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시문에 능하였고 1397년(태조 6년) 하륜 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조준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 세기가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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