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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 (安東 臨淸閣) -보물 제182호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2. 10. 29. 13:15
안동 임청각 (安東 臨淸閣) -보물 제182호
종목
보물 제182호 명칭
안동 임청각 (安東 臨淸閣)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
1 동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20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이창수 설명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한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경북 안동에 있는 고택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임청각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 등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며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르포]문 대통령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라 한 '임청각' 가보니http://news.joins.com/article/21845233?cloc=joongang|section|realtimerecommend복원될 것이라 생각하니 참 다행이다 싶[이 명]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호원(浩源). 할아버지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아버지는 영산현감 이증(李增)이다.이명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1486년(성종 17)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동방(同榜)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조카 이주(李冑)가 처형되면서 온 집안이 화를 입어 정붕(鄭鵬)과 함께 영덕에 유배되고, 중형 이굉(李浤)은 영해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 즉위 후 풀려나 의흥현감이 되었으며, 어진 다스림으로 칭송이 있었다.
1513년 중형 이굉이 개성유수에서 사직하고 은퇴하자 함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안동부(安東府) 동편 영남산(映南山) 기슭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맑은 물을 곁에 두고 시를 읊음)’의 구절을 취하여 임청각(臨淸閣: 현 안동시 법흥동 소재)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안동의 부로(父老) 148인(모두 우향계(友鄕稧) 자손)과 모임을 이루어 강호의 낙으로 여생을 즐겼다.
이명의 유고 「좌랑임청부군유사(佐郞臨淸府君遺事)」가 남아 있다.
http://and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401434에서[石洲(석주) 李相龍(이상룡)
▣ 李相龍(이상룡): 1858년(철종 9년) ~ 1932년(임시정부 14년)
* 독립운동가 본관은 固城(고성) 자는 萬初(만초) 호는 石洲(석주) 안동시 법흥동 출신 * 初名(초명)은 象羲(상희)였으며 1911년 西間島(서간도)로 망명 후 啓元(계원)에서 相龍(상룡)으로 개명하였다 * 정치제도와 실용지학을 탐구하였으며 천문 지리 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략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 1909년 4월 대한협회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이상룡은 신민회와 더불어 西間島(서간도) 이주 계획을 세우고 1911년 2월 3일 家率(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 서간도로 망명한 후 이상룡은 오로지 이주 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 이상룡은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동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역사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족정신과 주인정신을 동포들에게 심어주고자 우리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래서 한국고대사를 만주를 중심으로 단군 부여 고구려 발해(대진국)의 흐름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한 신라 백제 가야로 연결시키는 이원적인 구도를 체계화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만주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것은 만주와 중국 북부가 고대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는 것을 부각시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그를 통해 독립에 대한 신념을 동포들에게 주입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 이었다 . *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5월에는 新興講習所(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 3.1운동 후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 이상룡은 김동삼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韓族會(한족회)를 조직하였다 .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안이 통과 되어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박은식은 헌법개정을 추진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국무령체제로 바꾸고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여 그해 9월 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國務領(국무령)에 취임하였다 . 그러나 독립운동세력의 조정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1926년 국무령직을 사임하였다 .* 1926년 2월 만주로 다시 돌아온 이상룡은 우선 만주 내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라도 먼저 이루러는 생각에서 正義府(정의부) 參議府(참의부) 新民府(신민부) 3대 재만광복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 1932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에서의 항일운동도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병으로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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