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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하회 충효당 (安東 河回 忠孝堂)-보물 제414호
    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2. 10. 30. 21:51

    안동 하회 충효당 (安東 河回 忠孝堂)-보물  제414호

     

     

     

    종목

    보물 제414 호

    명칭

    안동 하회 충효당 (安東 河回 忠孝堂)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2동

    지정일

    1964.11.14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종가길 69 (하회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류영하

    설명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류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애 류성룡(1542∼1607)

    류성룡(柳成龍, 1542년 ~ 1607년 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관료,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 본관은 풍산(豊山), 는 이현(而見), 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성[1] 출신이며, 간성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원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중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경상북도 출신.

    생애 초기

    어머니 안동 김씨의 친정인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서림에서 출생하였다. 군수 류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런데 유성룡은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스승인 이황양명학을 사학(邪學)이자 사문의 화라고 비판하며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도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를 비판한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심의겸김효원의 전랑 천거를 반대하자 같은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김효원을 변호하였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서가 분당되자 그는 동인에 가담하였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 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정여립의 사건으로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였다.

    이때 서인 정철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이산해 등을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유성룡과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유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4]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유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했다.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

    1590년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수는 없다며 류성룡과 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박했다.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졸재 류원지(1598∼1674)

    우울 류의하(1616∼1698)

    1616년(광해군 8)∼1698년(숙종 2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안(子安)이고, 호는 우눌(愚訥)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이다.

    조부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고, 부친 진안현감(鎭安縣監) 유원지(柳元之)와 모친 김시추(金是樞)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숙조(叔祖) 유진(柳袗)에게서 배우고, 자라서는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관직은 1664년(현종 5)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 1667년(현종 8) 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 1668년(현종 9) 내섬직장(內贍直長), 1671년(현종 12) 봉화현감(奉化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나, 1674년(현종 15) 부친상을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1676년(숙종 2)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1677년(숙종 3) 의흥현감(義興縣監) 등을 지냈다. 1677년(숙종 3)에는 숙종으로부터 나이가 많아 판단력이 흐려져 더 이상 현감직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는 명을 받고 해임되었다. 그 후 1678년(숙종 4) 충훈도사(忠勳都事)에 재수되었다가 바로 송라찰방(松羅察訪)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친의 병환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천안현감(天安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우눌재집(愚訥齋集)』이 있다

    집필자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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