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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安東 禮安李氏 忠孝堂) -보물 제553호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2. 10. 27. 17:05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安東 禮安李氏 忠孝堂) -보물 제553호
종목
보물 제553호 명칭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安東 禮安李氏 忠孝堂)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1 동 지정일
1971.08.30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이준교 설명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서쪽에는 一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가진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이 집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고 변형도 되었으나 나직한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풍산평야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상류주택과는 달리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이 강하다.
입구로 들어서면왼쪽으로 쌍수당 앞에는 연못이 있고
쌍수당
마당에 들어서 왼쪽으로는 쌍수당 높이 보이고
마당 뒤편으로 사랑채 길고
마당은 넓다.대문이 있지만 문은 굳게 닫혔다.마당 오른쪽으로 돌아드니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편도 마루난간으로비교적 잘 정리된 고택이다.
예안이씨(禮安李氏) 충효당(忠孝堂) 파조(派祖) 이홍인(李洪仁, 호 풍은:豊隱(의병장, 충신정려 받으심)의 7대손, 이민정(李敏政), 이민적(李敏迪) 형제 중 동생인 민적 후손이 체화정(棣華亭) 문중이라 하며, 주손(胄孫)은 17대손 이교하(李敎夏)이다.
또한 의장공(義將公)이 충신시려(忠臣諡閭)가 되고,
이한호(李漢伍, 호 용눌재공:慵訥齋公)는 선효 생전에 지극하신 효행을 하였다. 서후(逝後)에는 어머니를 체화정에 모시고 지극한 효도를 하였으며, 후에 효자시려(孝子諡閭)를 받았다.8대손 용눌재공(慵訥齋公)이 효자시려 되어
충효를 쌍수(雙修) 하였기 때문에충신 의장공의 유택이 충효당(忠孝堂)으로 명명되고, 보물 제 553호로 지정되었으며 충효당 문중으로 호칭되고 있다.
이 홍인
당시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몰려왔다. 안동 역시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렇지만 안동에는 의병 운동이 있었고 의병장으로 덕망 있는 인사들이 추대되었으며 반가에서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내어 군수(軍需)로 사용하게 했다.경북 군위 출신 아주 신씨(鵝州 申氏)인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라는 이가 예안 현감으로 있다가 지역민을 이끌고 예천 호명리 지역에 진을 쳤고, 권몽삼(權夢參)이란 분은 예천 지역의 의병을 이끌고 의성 다인 지역에 진을 쳤으며
권전(權詮)이라는 분은 용궁 지역의병을 이끌고 우두원에 진을 쳤다.
왜적은 의성 다인 지역을 거쳐 강을 건너 대죽촌(大竹村)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었다.
■ 700여 장정과 최후의 방어선 구축그러나 이들 세 고을의 의병진은 접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제 조선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서애 류성룡의 고향 안동 하회를 위시한 안동지역은 저들의 도륙을 당할 운명에 있었다. 이 때 풍은의 빛나는 공이 펼쳐졌다.
풍은은 가산을 아낌없이 털어 의병을 조직하고 하회와 인접한 안동 구담(九潭)에 700여 장정과 함께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맞섰다. 싸움에서 일시에 패한 의병장 권전은 남은 병사를 풍은에게 인계하고 의병장의 소임을 지웠다. 풍은은 저들의 칼날을 겁내지 않고 여러 차례 싸웠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몸은 지키지 못한 채
1594년(선조27) 3월 7일 전장에서 69세로 삶을 마쳤다.
빛났을 전략과 통쾌한 승전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같은 과정이 있었을 것임에도 남은 기록에 없다.
순조 대(순조11:1811년)에 이르러서야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뒤늦은 인정과 보상이다.
이 한오
이한오(李漢伍): 1719~1793. 자는 효승(孝承), 호 용눌재(慵訥齋)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순국한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1528~1594)의 8대손이며, 이민정(李敏政)의 아들이다. 효행이 뛰어나 평생 부모 봉양에 지성을 다했다. 1812년(순조 12)에 그 효성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다.
http://www.ugyo.net/et/pol/cmbk_view.jsp?s
선생의 부친이 병환이 심해 지극 정성을 다하였으나, 백약이 무효, 차도가 없었다.병중 부친이 꿩고기와 잉어를 원하시기에 이른 새벽에 낙동강 기슭, 수동 물가에 가서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저녁이 되도록 잡지 못하다가 허탕을 치고,해질무렵 한 마리를 잡아서 급히 돌아 가는데, 갑가지 호랑이가 나타나기에 호랑이에게 병중 아버님께 다려 드린 후에 날 잡아가라고 했는데 호랑이는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집에 까지 오더니 갑자기 호랑이는 없어지고 꿩이 한 마리가 날아와 앉으니 그 꿩을 잡아 잉어와 함께 다려 드리니 부모님의 병환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선생님은 학덕이 탁월하여 세민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그후 조정에까지소문이 퍼져 당시(순조 임금 재위시 임신년 서기 1812년)에 하늘이 아는효행이라 하여 정효각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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