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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천사부도 (香泉寺浮屠)-멸운스님 부도나의 문화재 이야기 2018. 5. 15. 11:57
향천사부도 (香泉寺浮屠)-멸운스님 부도
http://blog.daum.net/leeke2000/16505388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chmount&logNo=20159018421
에서멸운대사의 초상이라고숙종 34년(1708)=강희4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00년 이상의 시간차강희47년의 오기로보인다.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그렇다.[멸운대사의 부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도 옥개석 추녀끝에 대사의 얼굴을 새겨 두었습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더러 무덤 앞에 피장자의 사진을 게시한 것을 볼 수 있으나,우리의 경우에는 멸운대사가 유일하지요.참으로 재밌는 발상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유언이었는지? 아니면 남아있는 제자들의 생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멸운 대사에 비중을 둘 것 없이 우리의 부도 문화상으로 볼 때 저것은 매우 귀한 유물이 아닐까 싶네요.](http://blog.daum.net/sketch1365/4660)그렇다.<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4> 향천사의 얼굴 새긴 부도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1210500137#csidx9c74f8ce0d42b2ab8b088a4372a4053선조들이 묘소나 묘탑에 초상을 남겨 놓는 일은
아직 본 일이 없다.
정말 특이한 일이다.
멸운스님의 승탑이 있었으나
100여년 후 다시 다시 세운 것은 아닐까?
강희 27년? 강희 47년?강희 47년
숙종 34년 1708년
멸운대사는?
영규대사와 함께 했다는 데
영규대사는?
영규(靈圭, 생년 미상 ~ 1592년)는 조선 중기의 승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 호는 기허, 속성은 박으로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500명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다시 제2차 금산 전투를 벌였고 격전 끝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종용사에 제향되었으며 법도, 대인에 의해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영규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 충남 예산 향천사(香果寺)에서 승병 50인을 이끌고 공주 갑사로 가서 기허 영규(騎虛 靈圭)의 승병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렀으며 순천(順川)일대의 무기고 수비에도 공을 세웠다. 부도는 향천사에 있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조선불교통사)영규대사묘(靈圭大師墓)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계룡면사무소에서 계룡산 갑사(甲寺) 진입로를 조금 지나 오른편에 있다. 1977년 1월 6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멸운스님의 승탑이 있었으나
100여년 후 다시 다시 세운 것은 아닐까?
100여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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