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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간정사 (南澗精舍)-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2. 19. 12:49

    남간정사 (南澗精舍)-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종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명칭

    ()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3동/남간정사 : 100.2㎡, 기국정 : 67.8㎡, 남간사 : 90.1㎡

    지정일

    1989.03.18

    소재지

    대전 동구 중청로 53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송영돈,우암사적공원관리소

    설명

    낮은 야산 기슭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은 것이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 때 서재를 짓고 능인암이라 하여 학문을 연마하였다. 숙종 9년(1683) 능인암 아래에 이 건물을 지었는데, 많은 제자를 기르고 그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깊은 곳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오른편 뒷쪽 1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양식이다.

    건물 앞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시대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이, 뒷편 언덕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가 있다. 또한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맞은편 언덕에 있다.

    송시열과 관련된 건물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남간정사를 들어가지 못했기에 따로 안내간판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송시열은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의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과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 활동했다.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우재(尤齎), 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아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길준, 이유태, 김경여, 윤선거, 김익회 등과 함께 김장생, 김집 부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26세까지 충남 옥천군 외가에서 살다가 대전 회덕으로 옮겼다. 인조 11년(1633)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1637년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10여 년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존주대의(尊周大義 : 명나라를 섬김)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수치스런 일에 대한 복수, 즉 북벌론)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이후 충주목사, 사헌부집의, 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효종 9년(1658)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인 趙大妃)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면서 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3년 복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와 대립했다. 결국 1년 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예론을 둘러싼 논쟁이 당쟁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송시열은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하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며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 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받았으나 향리에 묻혀 지내며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종 9년(1668)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은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하여 실각당했다.

     

    이듬해에는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 장기, 거제, 청풍 등지로 옮겨 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등용되었다.

     

    그 뒤 남인의 숙청문제로 서인 내부에서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하자는 김석주 등을 지지하여,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에 경종이 됨)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식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그 후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70여 개의 서원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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