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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숭겸장군유적 (申崇謙將軍遺蹟)-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기념물 2013. 2. 17. 15:09

    (申)-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종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명칭 ()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 45,169㎡
    지정일 1982.03.04
    소재지 대구 동구 신숭겸길 17(지묘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표충재평산신씨문중
    설명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순절단,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관리실을 지나면 왼쪽으로 신숭겸장군 기마동상이

     

     

     

     

     

     

     

     

     

    계속직진하면

     

     

     

     

     

    상절단 출입문 충렬문 그러나 문이 닫혀서 상절단은 볼 수 없었고

     

     

     

     

     

    오른족으로 좀 더가니 왼족으로는 표충사 출입문 여기도 굳게 닫혀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고

     

     

     

     

     

    오른쪽으로는 태조왕건나무가

     

     

     

     

     

     

     

    죽 더 나가니 외국인을 위한 공간이 ,외국인 보다는 우리가 더 필요한 홍보 전시 공간이 있었다.

     

     

     

     

     

     

     

     

     

     

     

     

     

     

     

     

     

     

     

     

     

     

     

    순절단으로

     

    순절단은 담으로 둘러

     

     

     

     

     

     

     

     

     

     

     

     

     

     

     

     

     

     

     

     

     

     

     

     

     

    신숭겸( 
    ?∼927(태조 10). 고려 전기의 무장(武將).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列傳)에는이광해주(光海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견훤고울부(高鬱府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그와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도이장가(悼二將歌)
    시대 고려
    성격 가요
    유형 작품
    저작자 예종
    창작/발표시기 1120년(예종 15)
    분야 문학/고전시가


       1120년(예종 15) 예종이 지은 향찰표기(鄕札表記)의 가요. 신숭겸(申崇謙)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평산신씨장절공유사 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그 제작동기에 관한 소상한 기록과 함께 작품이 전한다. 창작경위에 관해서는 그밖에도 ≪고려사≫ 권14, ≪명신행적 名臣行蹟≫,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 등에 간략하게나마 보인다.
       예종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金樂)으로,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예종이 감격해서 한시와 함께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님을 온전케 하온/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넋이 가셨으되/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좋다, 두 공신이여/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이 작품에 대한 주요쟁점은 장르적 성격과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장르에 관한 문제는 이 작품을 향가로 볼 것인가 고려가요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향가로 보는 근거는 표기가 향찰이라는 점과, 형식이 향가의 8구체와 같다는 데 있다.
       고려가요로 보는 근거는 창작연대가 신라의 향가와는 너무 떨어져 있고, 형식을 향가의 8구체와 동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으며, 향가는 3음절 중심임에 비하여 이 작품은 2음절 중심이라는 데 두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은 장르적 성격 판단의 기준을 겉으로 드러난 형태에 둔 점이다.
       종래 2연시로 보아왔던 이 작품이 앞의 해독에 따르면 단연시로 파악된다. 뒷부분의 “좋다, 두 공신이여”는 사뇌가(詞腦歌)에서 차사(嗟辭)로 시작되는 이른바 후구(後句)에 해당한다. 이러한 구조적 유형에 따라 이 작품은 사뇌가에 맥락이 닿으므로 향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품에 표출된 미의식은 숭고(崇高)이다. 오로지 임(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겠다는 충성심이 하늘 끝까지 미쳤기에 두 공신의 장렬한 죽음은 값진 것이며, 죽음의 비극을 초월하여 숭고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순간적인 것이나, 곧은 자취, 곧 충절은 영원한 것으로 하여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
       제작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팔관회와의 관련이나 주술제의적 측면, 제5행에 드러난 가상(假像)의 주술적 발언 등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특히 주술적 숭고미를 구현하고 있다. 아울러 영웅적 인물이 현실과 죽음을 초극하는 장엄한 행위는 인격적 숭고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에는 인격적 숭고미도 동시에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것 가운데서 임금이 지은 가장 오래된 향가로, 제작연대와 제작경위가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809

     

    https://youtu.be/uMX5LlfvWM4

    https://youtu.be/uMX5LlfvWM4?t=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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