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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잠간 생각나의 문화재 이야기 2017. 2. 9. 14:00
칠지도(七支刀)
잠간 생각
텐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石上) 신궁(神宮)은?
일본 나라 현 텐리 시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에 봉안되어 있다. 〈니혼쇼키〉 신공기에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작연대는 369년으로 알려져 있다.
칠지도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豈辟百兵, 宜供供侯王. □□□□作
칠지도 뒷면: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1977년과 1978년에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1981년 NHK에서 촬영한 X-레이 사진을 통해 보면 年(연)자와 月(월)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되어 그동안 五月(5월)로 보았던 명문을 十一月(11월)로 볼 수 있게 되었다.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 그런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2009년 고려대연구원인 홍성화는 NHK의 X-레이 촬영으로 칠지도의 명문의 연(年)자와 월(月)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됨에 따라 제작일을 11월 16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11월16일이 병오(丙午)의 일간지(日干支)를 가진 연도를 산출하면 칠지도 제작연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이 되어 백제의 전지왕(腆支王)4년 11월16일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명문(銘文)의 '泰□四年'은 전지왕 4년으로 추정할 수 있어 백제가 연호를 썼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명문의 '侯王'(후왕)도 백제에 신속하고 있던 후왕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칠지도는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인 구이신(久爾辛)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이라고 주장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9%A0%EC%A7%80%EB%8F%84
해석의 여지가 없군
이와 유사한 유물이 한반도에서 여러점 나오면 좋겠다.銘文についてはこれまで様々な研究がなされてきた。銘文の判読はもちろん、彫られた場所についても「表は東晋で鋳造された際に刻まれ、裏は百済で刻まれた」などの説もある。しかし内容は「百済王が倭王に贈った」との解釈が定説とされ、当時の背景として、高句麗の圧迫を受けていた百済が倭との同盟を求め、贈られたとされている。
また、日本書紀等の史書では、百済が倭に対して複数回朝貢し人質を献上していたことが記述されているが、この七支刀献上に関して、日本書紀神功皇后摂政52年条に、百済と倭国の同盟を記念して神功皇后へ「七子鏡」一枚とともに「七枝刀」一振りが献上されたとの記述がある。紀年論によるとこの年が372年にあたり、年代的に日本書紀と七支刀の対応および合致が認められている(後述)。
명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명문 판독은 물론이고 조각된 장소에 대해서도 표는 동진에서 주조됐을 때 새겨지고, 뒷면은 백제로 새겨졌다는 등의 설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했다는 해석이 정설로 알려져 당시 배경으로 고구려의 압박을 받던 백제가 왜와의 동맹을 요구하며 선물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본서기 등의 사서에서는 백제가 왜를 상대로 여러 차례 조공하고 인질을 헌상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 7지도 헌상에 관해서 일본서기신공황후섭정52년 조에 백제와 왜국의 동맹을 기념해 신공황후에게 ‘나나나코경’ 한 장과 함께 ‘나시카지도’ 한 장이 헌상되었다는 진술이 있다. 기년론에 따르면 이 해가 372년에 한해 연대적으로 일본서기와 일곱도의 대응 및 합치가 인정된다(후술).
https://ja.wikipedia.org/wiki/七支刀Eta Funayama SwordEta Funayama Burial Mound Sword (江田船山古墳鉄剣 eta funayama kofun tekken) in Japan is a 5th-century ancient iron sword excavated from the Eta Funayama kofun in Kumamoto Prefecture, Japan in 1873. The inscription on the blade indicates that the sword was made during the era of Emperor Yūryaku in the 5th century. The burial objects from the Eta Funayama site including this sword have been designated as National Treasure of Japan in the category archaeological materials.The original inscription and translation is as follows.
Portions of the text are now illegible, rendered above as □, making it difficult to interpret. The name of the ruler, Wakatakiru, is reconstructed from evidence on the Inariyama burial mound sword.
https://en.wikipedia.org/wiki/Eta_Funayama_Sword'나의 문화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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