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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호장군고택 (慶州 金虎將軍 古宅)-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문화재/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2017. 2. 5. 18:01
경주김호장군고택 (慶州 金虎將軍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
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
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 명칭
경주김호장군고택
(慶州 金虎將軍 古宅)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일곽
지정일
1977.01.08
소재지
경북 경주시 식혜골길 35 (탑동)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김영모,이영숙
설명
조선 선조 25년(1592) 부산첨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호가 살았던 집이다.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는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김호의 후손 김헌용이 사망하여 지금은 큰아들 김철하가 관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선 정면에 안채, 왼쪽에 아래채, 안채 오른쪽 뒤편으로 가묘(家廟)가 배치되어 있다. 원래 사랑채가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자리만 남아있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집을 처리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대청에 문짝을 다는 예는 안동지방 북쪽에서 드물고, 경주, 월성 일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발견되며, 그 중 에서도 특히, 이집은 오랜 수법을 보이는 예로 주목받고 있다.
아래채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왼쪽부터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하여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가묘는 따로 담장을 둘러 세운 맞배지붕집으로 안쪽을 모두 터 놓은 통칸으로 만들었다.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 중 하나로 옛 건축 수법과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탑동김헌용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김호 장군(?~1592)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김호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 중요민속문화재 제34호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탑동김헌용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김호 장군(?~1592)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김호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경주 월암 종택 (慶州 月菴 宗宅)
2018.12.26 현재
김호 장군 고택은 1976년 12월 31일 중요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 당시의 명칭은 ‘경주 탑동 김헌용 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호 장군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2007년 1월 29일 ‘경주 김호 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김호 장군
경주 노곡전투관직생활을 마치고 향리 경주로 내려와 살고 있던 전 훈련원 봉사 김호는 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김호는 경주 부근을 돌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의 대오를 갖추어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노곡전투 당시 경상북도 일대에서는 의병장 권응수가 영천성을 이미 수복하여 지키고 있었으며,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강에 주둔하면서 치안회복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군은 영천군, 의성군, 안동부를 잇는 보급선을 버리고 후퇴한 후 양산군, 밀양부, 청도군, 대구부를 통하는 전선만을 굳게 지키면서 경주에는 소수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을 때이다.
이때 양산성을 지키고 있던 이시카와 야스카쓰(石川康勝) 등 장수들은 언양현에 군사를 보내 점령한 다음 더 북상하여 경주 부근까지 점령하기로 결의했다.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들이 경주성을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양산 주둔 일부 병력의 경주성 파견을 결정한 것이다. 양산에 주둔하던 병력 중 500명이 경주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하여 1592년 8월 1일 언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언양을 거쳐 바로 경주로 향했다.
이때 경주 부근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의병대장 김호는 척후병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를 선봉장으로 삼아 의병 1,400명을 거느리고 8월 2일 이른 아침에 언양 쪽으로 출동했다.
의병부대 선봉이 경주 인근을 벗어나 노곡(奴谷, 현재의 경주시 내남면 이곡리 경부고속도로 경주휴게소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의병 선봉대는 함성을 울리며 돌격했고 일본군은 갑작스런 공격을 당하여 계곡으로 퇴각했다.
(현재의 내남면 이곡리가 없고 이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조리의 잘못 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김호는 노곡에서 군사 500여 명으로 적의 퇴로를 막았으며, 소모유사(召募有司) 최신린(崔臣隣)은 400여 명을 이끌고 반대쪽으로 가 적을 포위했다. 세 방면에서 포위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 일본군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 위해 최신린이 지키고 있는 산비탈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의병들은 돌을 굴리고 활을 쏘아 적병 다수를 사살했다. 최신린은 기마에 능숙하지 못했는데 말이 넘어진 후에는 말을 타지 못하고 큰 나무 뒤에서 활을 당기기만 했다. 주사호는 백병전이 시작되자 곤장을 들고 닥치는 대로 적을 타살하니 다른 의병들도 모두 앞을 다투어 싸웠다.
한편 의병장 김호는 말을 몰아 수없이 적의 머리를 베었으나 그의 몸에도 화살 7~8대가 꽂혔다. 그 상태에서도 김호는 적진을 좌충우돌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의병군은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다시 50여 급을 베었다. 8월 2일의 이 전투를 노곡전투라고 부른다.
김호는 전투가 끝나고 부대에 돌아와 전사했으며 나중에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첨사로 추서되었다. 주사호는 노곡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로 운량사(運糧使)가 되었으나 표창을 받은 날 퇴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임진왜란의 흔적한국에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담은 유적과 유물이 지역 곳곳에 분포해있다. 전란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현장과 남겨진 흔적들을 지역별로 정리하여 기록했다.
저자김현우출판사한국학술정보'문화재 > 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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