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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묘 (死六臣墓)-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3. 2. 9. 10:05
사육신묘 (死六臣墓)-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종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명칭
사육신묘 (死六臣墓)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
7 기 지정일
1972.05.25 소재지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사유,동작구 설명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워 두었다.
1955년에는 사육신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후 묘역을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여 충효사상을 기리고자 하였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묘도 만들어 함께 모시고 있다.신도비각 河緯之선생,成三問선생,柳誠源선생,李塏선생,兪應孚장군,朴彭年선생,金文起선생 순 입니다.
하위지(1412(태종 12)~ 1456(세조 2)).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집현전학사·사관으로 활약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로서 〈오례의주 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했다. 1446년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재직하던 형 강지(綱地)가 탐간죄로 투옥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 형을 보살폈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했고, 이듬해 춘추관사관으로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1450년(문종 즉위) 사헌부장령이 되어 대신들의 비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대간의 직분을 다했다. 다음해 직집현전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 〈진설 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 歷代兵要〉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병서 편찬에 참여했던 학사들의 품계를 올리려 하자, 종신(宗臣)이 함부로 사은(私恩)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다. 이에 집현전직제학으로 전보되자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갔다. 다음해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춘추관편수관으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단종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1455년(세조 1) 예조참의로 재직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참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그해부터의 봉록은 취하지 않고 별실에 쌓아두었다.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자 주제(周制)를 들어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했다. 이에 세조는 그의 관(冠)을 벗기고 장(杖)을 쳤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추진하여 명의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거사가 연기되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복위운동이 탄로나고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국문(鞠問)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1691년(숙종 17) 신원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선산 월암서원(月巖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아버지는 도총관 승(勝)이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죽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 어린 단종의 보필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정인지·박팽년 등 36명과 함께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의 공이 있다고 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고 다짐하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단종복위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세조의 집권과 즉위에 이르는 과정에서 많이 등용되고 배려를 받았던 그들이 복위운동에 나섰던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이 깔려 있기도 했지만, 관료지배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들로서는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마침내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윤영손(尹鈴孫)·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1456년(세조 2) 6월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것을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갑자기 한명회의 제의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을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승·이개·하위지·유응부·박중림·김문기·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다.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처형·유배 등을 당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직·홍섬·이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색인 : 〈육신전〉). 이후 이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 하는데, 현재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 그곳이다. 또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강원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특별시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류성원(?~ 1456(세조 2)).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문화.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瑯玕). 아버지는 사인(舍人) 사근(士根)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445년 집현전저작랑(集賢殿著作郞)으로 〈의방유취 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447년 문과중시에 합격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다음해에는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극감(李克堪) 등과 함께 열전(列傳)을 담당하여 찬술했으며, 춘추관기주관으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뒤 집현전에 정난녹훈(靖難錄勳)의 교서(敎書)를 만들도록 명하자, 집현전교리로 있던 그는 혼자 남아서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교서를 작성했다(→ 색인 : 계유정난). 이해 11월 장령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책정의 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54년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55년 6월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그는 박팽년·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 그러나 1456년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이 사실이 탄로나자 자결했다. 그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 秋江集〉에 육신전을 실어 널리 알려졌다. 1691년(숙종 17) 관작이 회복되었고,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개(1417(태종 17)~ 1456(세조 2)).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종선(種善)이며, 아버지는 계주(季疇)이다. 1436년(세종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441년 집현전저작랑으로 재직중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했고,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으며 〈운회 韻會〉·〈동국정운 東國正韻〉의 번역·편찬작업에도 참여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50년(문종 즉위)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었을 때 좌문학(左文學)으로 〈소학〉을 강의하여 문종에게 칭찬을 받았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김질(金礩)의 밀고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다.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친교가 두터워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의연하게 관련자들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시문이 절묘했고, 글씨에도 능했다.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충간(忠簡)으로 고쳐졌다.
유응부(?~ 1456(세조 2)). 단종복위를 추진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경원절제사를 지내고 1452년(단종 즉위) 의주목사, 1453년 평안좌도절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 왕권이 강화되고 신권이 약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세조의 불의의 찬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大義)가 내세워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다. 세조가 상왕(上王: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여 벌인 연회에서 성승(成勝)과 함께 별운검(別雲劒)을 맡게 되자 그 자리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세조가 연회 당일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했으며, 왕세자도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대로 거사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의 만류로 모의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이때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단종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를 포함한 주모자 6명은 체포되어 형살(刑殺)되거나 자살했으며, 이에 연루된 70여 명이 화를 당했다. 세조가 국문하면서 그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라고 묻자, "한 칼로 족하(足下:세조를 가리킴)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대답하여 극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1691년(숙종 17) 12월 사육신을 국가에서 공인함으로써 복관되었으며, 1791년 2월 절의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때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박팽년(1417(태종 17)~ 1456(세조 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중림(仲林)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으면서, 그를 비롯하여 황보인·김종서·성삼문 등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부제학을 거쳐 1454년 좌승지·형조참판을 지냈다. 145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신권의 지나친 강대화와 왕권약화를 우려한왕실세력 중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을 축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세조에게 올리는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대신 '거'(巨)라는 글자를 쓰고 녹봉에도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다시 형조참판에 기용되었다.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관료가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 대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등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조치에 대해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와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유신들은 마침내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려 했다. 당시 형조참판으로있던 박팽년은 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 등 대부분 전직·현직 집현전 유신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456년 6월에 창덕궁에서 상왕인 단종 앞에서 명(明)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호위를 맡은 성승(成勝)·유응부 등이 세조와 그추종자들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갑자기 세조가 이들의 시위(侍衛)를 취소시켰으므로 거사를 후일로 연기했다. 이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 등이 불안을 느끼고 이를 밀고해 성삼문 등 주모자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가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려 했으나,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다. 얼마 후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순(珣)·분(奮) 등 3대가 처형되었으며, 어머니·처·제수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으로 노비가 되었다. 1691년(숙종17)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 秋江集〉에 사육신전을 적어 그를 비롯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6명의 충절을 기렸다.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글씨가〈취금헌천자문 醉琴軒千字文〉에 남아 있으며 묘는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묘역에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김문기(1399(정종 1)~ 1456(세조 2)). 본관은 김녕(金寧).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할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순(順)이며, 아버지는 증 영의정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예문관검열·사간원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 등을 지냈다. 1445년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 1450년에는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로 있을 때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에 오른 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1456년(세조 2)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과 단종복위를 계획한 뒤 병력동원을 맡았다. 그러나 김질(金礩)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에 가담한 사육신,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처형당했다. 사육신은 그뒤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에 육신전(六臣傳)이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 1691년(숙종 17) 복관되었다. 그도 1731년(영조 7)에 복관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정조가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삼중신(三重臣:민신·조극관·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금릉군 지례 섬계서원(剡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 문제를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를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설치했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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