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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양미암사당 (潭陽眉巖祠堂)-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36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민속자료 2016. 11. 10. 12:18

    담양미암사당 (潭陽眉巖祠堂)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36호



     

     

    종목

    전라남도민속문화재 제36호

    명칭

    담양미암사당 (潭陽眉巖祠堂)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수량

    1 동

    지정일

    2001.09.27

    소재지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동길 89-4 (장산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


    관리

    유근오

    설명

    미암사당은 조선조 선조 초년의 명신인 미암 유희춘(1513~1577)의 사당이다. 유희춘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안중, 호는 미암 또는 인재(寅齋)하고 한다. 본관은 선산이며 순천에서 해남으로 이거한 유계린(柳桂麟)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의 외손이다. 1537년(중종 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무장현감 등을 지내다가 을사사화때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되어 19년의 유배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567년 유배에서 돌아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로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종가댁의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면에서 2자 높이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건축하였으며, 정면 퇴간의 처마단이 비교적 넓어 비바람을 막기에 좋도록 하였다.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증을 세우고, 주심포 형식의 가미된 초익공을 얹었다. 두공첨차는 경사부분을 쌍화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소로와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퇴보를 얹어 겨루하였는데 끝에 봉두형식으로 조식하였다.

    가구형식은 1고주 5량으로 양쪽의변주는 낮은 펴주를 세우고 몸체는 높은 고주를 세워 대들보 위의 동자주와 같은 높이를 이루었다. 동자주와 고주 위에는 마루보를 얹어 포대공과 파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지지하고 있다. 지붕은 정면은 겹처마, 배면은 홑처마로 견실한 서까래를 설치하고 부연을 얹었다. 박공면에는 풍판을 대었다.

    정면 3칸 모두 출입문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가운데 칸의 문을 사용하고 있다. 문틀 상단 외벽에 칸별로 6자×2자의 벽화가 3폭 그려져 있다. 벽화는 왼쪽에 백학도(白鶴圖), 가운데가 등룡도(登龍圖), 오른쪽이 봉황도(鳳凰圖)가 보인다. 건물 내외부 모두 단청이 되어있다. 바닥에서 5자 높이에 3면 모두 신위단을 설치하였다. 신위단에는 미암이 1577년 치사하향(致仕下鄕) 하면서 선조가 친히 입혀주셨던 방한복이 채상에 보관되어 있으며, 건물 서쪽 외벽에 미암이 친히 탔던 초헌의 틀이 매달려 있다. 사면 모두 흙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은행나무 한 쌍이 식재되어 있다. 출입문은 일주문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건축년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상량문이 상량에 없다. 기와를 깔아 끼우면서 명문이 있는 암막새 기와가 발견되었다. 엄지 굵기의 양안이 솟아있고 양각으로 7행이 종서되어 있는데 추월산 진경사(辰慶寺)에서 만력 36년(1608)에 만든 기와임이 확인되어 건축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문에 따라 1608년이면 미암의 증손자인 유익원(柳益源, 1579~1645), 유익청(柳益淸(1582~1660) 형제에 해당된다.

    미암사당은 기와의 명문대로 건축년대가 1608년으로 추정된다. 물론 초창의 건물이 현재까지 그대로 내려오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1600년대 초의 목조건물이라면 아주 희귀한 예라 하겠다. 건축형식 역시 두공첨차와 파련대공에서 고식임을 짐작케 한다. 현재의 건물도 200년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창평에 미암을 배향하는 삼천사를 세우면서 미암가에서 서둘러 미암사당을 세운 것 같다. 현종 10년(1669) 미암을 배향하는 백천사가 의암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미암사는 영구불천묘로 지정되었으며 현종은 예조전랑 강운규를 내려보내 첫 제향을 지내게 된다.

    원래 사당에는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보물260) 11책과 미암선생문집 목판(396판), 유품과 고문서, 전적 등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1959년 미암사 앞 방죽호를 석조건물인 모현관이 지어지면서 이관되었다. 1608년 사당이 지어진 후 현재에 이르면서 많이 쇠락되어 뒤쪽으로 물러나 틀이 일부 어긋나 있으나 전체적으로 튼튼하게 결구된 편이다. 1991년 기와를 전면 갈아 끼웠으며, 내부의 바닥과 바깥 토방의 누습을 막기 위하여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미암사의 정면 외벽 문틀 상단에 그려져 있는 3개소의 벽화와 건물내부의 벽화는 미술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외부의 벽화는 왼쪽부터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로 그려져 있다. 백학도는 미암의 고고한 절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등룡도는 마침내 뜻을 얻어 현관으로 등용되는 화려한 관도를 상징하며, 봉황도는 일가의 화려한 출세도를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흙벽 위에 흙회로 단장한 후 색채로 그렸으나 바깥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오른쪽의 봉황도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다. 사찰의 외벽벽화는 많이 있으나 유교적 건축물인 사당에 벽화가 그려져 있기는 매우 드문 사례로 작품성보다는 희귀성이나 상징미가 돋보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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