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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세덕사 (環丘世德祠)-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7호문화재/내가 본 시도민속자료 2016. 1. 1. 13:52
환구세덕사 (環丘世德祠)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7호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7호
명칭 환구세덕사 (環丘世德祠)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수량 일곽
지정일
1990.08.07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환구길 142-1 (선원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
관리
정현목
설명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이었던 호수 정세아(1535∼1612) 선생과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1560∼15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정조 1년(1777)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그후 사당의 왼쪽에 충효각이 세워졌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어 지금은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이 남아있다.정세아( )
1535(중종 30)∼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의병.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사성 종소(從韶)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윤량(允良)이다.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 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그 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였다.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정의번(
1560(명종 15)∼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栢巖). 아버지는 의병장 세아(世雅)이다.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서 승리, 이어 경주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좌장군 박진(朴晋)의 패전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혈전을 벌이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우순사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로 호조정랑에 추증되고, 1732년(영조 8) 좌승지로 가증(加贈)되었다. 1784년(정조 8)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천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다.'문화재 > 내가 본 시도민속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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