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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곡 해은고택 (漆谷 海隱故宅)-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8호
    문화재/내가 본 시도민속자료 2015. 10. 31. 12:29

    (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8호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8호

    명칭 칠곡 해은고택 (漆谷 海隱故宅)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일곽(5동)

    지정일

    2013.04.08

    소재지

    경상북도 칠곡군 매원3길 104-10 (왜관읍, 해은고택)

    시대

     

    소유

     

    관리

     

    설명

    조선 중기 문신 석담 이윤우(1569∼1634)와 그의 아들 낙촌 이도장(1603∼1644)이 정착한 매원마을에 후손들이 세운 집 중 하나이다.

    안채인 정침은 이동유(1768∼1836)가 정조 12년(1788)에 짓고 사랑채는 순조 16년(1816)에 지었다. 그 뒤 이동유의 후손 이철연(1851∼1905)의 호를 따라 ‘해은고택’이라고 부른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 곳간채, 정침을 ㄷ자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정침 오른쪽에는 담장을 둘러 별도로 사당을 두었다.

    정침은 앞면 6칸 반·옆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채는 앞면 7칸·옆면 1칸 반 규모이고,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다. 또한 곳간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규모이며, 대문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모든 건물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이 집은 매원마을의 주택 중에서 지은 시기가 18세기 말로 오래되었고 규모도 잘 갖추고 있어 시대와 지역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들어갈 수 없어 사랑채 일부만 문틈으로 보았다.아쉽다.

     

     

     

     

     

    조선 중기 문신 석담 이윤우(1569∼1634)와 그의 아들 낙촌 이도장(1603∼1644)이 정착한 매원마을에 후손들이 세운 집 중 하나이다. 

    안채인 정침은 이동유(1768∼1836)가 정조 12년(1788)에 짓고 사랑채는 순조 16년(1816)에 지었다. 그 뒤 이동유의 후손 이철연(1851∼1905)의 호를 따라 ‘해은고택’이라고 부른다.

     

     

    석담(石潭) 이윤우( 

    [정의]
    1569(선조 2)∼1634(인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 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후손이며, 진사 덕무(德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경(遵慶)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희복(熙復)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도화서별서 숭(崇)의 딸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내용]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 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다.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특히 여진이 활발히 자국의 강토를 강하게 넓힐 때 변방의 방어에 힘써 표리(表裏 :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를 하사되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낙촌(洛村) 이도장(

     

    [정의]
    1603(선조 36)∼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준경(遵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복(希復)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윤우(潤雨)이며, 어머니는 인천채씨(仁川蔡氏)로 생원 응린(應麟)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내용]
    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곧 승문원권지정자로 등용되었다. 그 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주서 등을 지내다가, 1634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1636년 다시 주서로 복직하고,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637년 검열이 되었고, 이어서 봉교가 되었다가 지평으로 승직하였다. 1638년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에, 청나라에서 요청하여온 군사의 파견을 앞장서서 막았다.
    그 뒤 수찬을 지내고, 외직인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뒤 응교·사간 등으로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집필자 : 이재범

     

    이동유(李東維)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 이동유(李東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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