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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산 정원용 의대 (經山 鄭元容 衣帶)-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문화재/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2015. 11. 16. 16:29

    경산 정원용 의대 (經山 鄭元容 衣帶)

    -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명칭

    경산 정원용 의대 (經山 鄭元容 衣帶)

    분류

    유물 / / / 

    수량

    일괄

    지정일

    1968.12.12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 (세종로, 국립민속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국립민속박물관

    설명

    정원용(1783∼187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순조 2년(1802)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정원용의대로 지정된 유품으로는 조복 3점, 상 1점, 후수 1점, 패옥 1점, 홀 2점, 청초의 1점, 대례복 1점, 구군복 2점, 전복 3점, 제복 1점, 구군복대 2점, 술 4점, 장도 1점, 호패 7점 등이 있다.

    조복은 관복의 하나로 왕이나 신하가 천자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른 말로 ‘금관조복’이라고도 한다. 상(裳)이란 제복이나 조복 밑에 받쳐입는 치마 형태의 옷이다. 후수는 제복이나 조복 등을 입을 때 뒤쪽에 늘어뜨리던 수놓은 천으로, 관리의 등급을 나타냈다. 패옥은 법복이나 조복 및 제복을 입을때 양옆으로 달았던 옥(玉)으로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홀은 신하들이 왕을 뵐 때 손에 쥐는 물건으로, 왕의 가르침이나 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잊지 않으려고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의례용으로 제도화 되었다.

    청초의는 삶아서 익히지 않은 푸른색의 명주실로 만든 옷으로 1품에서 9품까지 입었던 제복이다. 대례복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 때 착용하였다. 구군복은 조선시대 문관과 무관들이 갖추어 입던 군복이며, 구군복대는 허리띠이다. 전복은 다른 말로 ‘답호’라고 하며, 소매, 무, 앞섶이 없고 뒤솔기가 허리 아래로 트여있다.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으로 머리에는 양관을 쓰고 푸른색 청초의를 입었다. 술은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인 명주실로 노리개에 사용된다. 장도는 몸에 지니는 칼로 남자는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차고, 여자는 치마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에 연결하여 가지고 다녔다. 호패는 호구 파악, 유민 방지 등의 목적으로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것으로 이 유물은 상아 ·황양목 ·배나무 ·흑각 등으로 된 호패 7점이다.

    경산정원용의대로 지정된 유물들은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중요민속문화재  제13호  

     

     

     

    문화재청자료

     

     

     

     

     

     

     

     

     

     

     

     

     

     

     

     

     

     

     

     

     

     

    패옥과 후수만 보았다.

     

    정원용다음항목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저서(작품)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정의]
    1783(정조 7)∼1873(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석증(錫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순(啓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동만(東晩)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기세(基世), 목사 기년(基年), 부사 기명(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내용]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20여 년 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저서로 『경산집(經山集)』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찰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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