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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만취당 (永川晩翠堂)-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문화재/내가 본 중요민속자료 2015. 12. 31. 14:53
영천만취당 (永川晩翠堂)
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
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
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 명칭
영천만취당 (永川晩翠堂)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
일곽
지정일
1984.01.14
소재지
경북 영천시 금호읍 종동길 25 (오계리)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조영배,박하진
설명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 지산 조호익 선생의 7세손인 조학신(1732∼1800) 선생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의 이름이다. 새사랑채인 광명헌과 별묘 및 보본재는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야산의 소나무 숲에 둘러싼 평지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집이다. 길쪽 새사랑채와 행랑채 솟을대문 지붕사이로 사랑채와 안채 지붕이 조금씩 보이는 평면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행랑채와 떨어져 있는 사랑채는 안채와 더불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그 뒤쪽에는 별묘와 보본재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사대부 집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중앙의 4칸 중에 오른쪽 2칸은 안방이 있고, 대청, 작은방이 있다. 중앙의 양쪽 끝에는 날개가 있어서 안방쪽으로 부엌과 고방이 있으며, 대청쪽으로 아랫방, 마루방이 있다. '만취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사랑채는 왼쪽 2칸은 사랑방이고, 그 다음이 대청이며, 오른쪽 끝에 제사지내는 방이 있다. 사랑채의 왼쪽에는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간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집으로 현재 방앗간채는 없어졌으나 안채를 비롯한 사랑채, 새사랑채, 별묘재사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주택의 구성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시의 건축 양식과 주생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 중요민속문화재 제175호 조호익
1545(인종 1)∼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사옹원정 치우(致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효연(孝淵)이고, 아버지는 증좌참찬 윤신(允愼)이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중우(仲羽)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풀려나와 금오랑(金吾郎)에 특별 임명되어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다. 그 뒤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고, 1593년 평양싸움에 참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그 뒤 대구부사·성주목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 『지산집』·『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가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으나,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되었다.조학신(曺學臣)에 대하여
1732년(영조 8)~1800년(정조 24). 조선 후기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이다.
성리학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의 후손으로, 조부는 조익천(曺翼天)이고, 부친은 치재(恥齋) 조선적(曺善迪)이다.
1759년(영조 35)에 정승의 추천으로 영조의 부름을 받았다. 영조가 청룡도(靑龍刀)를 주면서 시범을 보일 것을 요청하자 나아가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영조가 칭찬하고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에 제수한 뒤, 특별히 내시(內試)를 열어 합격하도록 하였다.
그 후 관직은 내직과 여러 고을의 목사(牧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등을 거쳐 1781년(정조 5)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까지 올랐다.
고을에 나가 백성들을 다스릴 때 정성을 다한 사실이 알려져 정조로부터 비단 안장을 한 말 한 필과 함께 『규장각지(奎章閣誌)』‧『규장전운(奎章全韻)』‧『대전통편(大典通偏)』‧「별군직제명첩(別軍職題名帖)」 각 1부씩을 하사받았다.
생을 마감했을 때 조정에서 장례에 쓸 부조와 함께 제문을 내려주었다.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琴湖邑)에는 그가 거처하던 집 영천만취당(永川晩翠堂)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집필자 : 이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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