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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성 초상 및 관련자료 일괄 (李德成 肖像 및 關聯資料 一括)-보물 제1501호
    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5. 8. 14. 17:20

    이덕성 초상 및 관련자료 일괄 (李德成 肖像 및 關聯資料 一括)

    -보물  제1501호

     

     

      보물 제1501호               보물 제1501호    
     
     

    종목

    보물  제1501호

    명칭

    이덕성 초상 및 관련자료 일괄

    (李德成 肖像 및 關聯資料 一括)

    분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

    초상1점, 고문서4종121점, 전적 5건

    지정일

    2006.12.29

    소재지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63, 부산시립박물관 (대연동,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공유,부산시립박물관

    설명

    이덕성(1655-1704)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1682년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동래부사, 해주목사, 황해도관찰사, 충청감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덕성 초상>은 높은 오사모에 녹색 단령을 입고 좌안칠분면의 자세로 교의에 앉은 모습이며 배경은 없다. 얼굴은 가는 선묘를 사용했으며 홍조를 표현하고 명암을 살짝 가했다. 육리문은 없으며 수염이 길고 구불거리게 묘사되었다. 단령은 비교적 가늘고 짙지 않은 먹선으로 윤곽과 의습선을 표현하였고 명암을 조금씩 가했다. 쌍학흉배는 밝은 녹색을 바탕으로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를 덮고 있는 표범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변모하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중요한 사례이다.

    이덕성 관련 고문서는 교서 3점, 유서 3점, 교지·교첩 114점, 시권 1점 등 모두 121점으로 백패와 홍패를 비롯하여 관직을 제수받았을 때의 관련교지가 흩어짐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덕성의 이력사항 및 전기자료로서 사료적인 가치가 있으며 인사·행정에 관한 연구자료가 된다. 또한 그의 몇몇 필적도 왕실유물 및 서예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ㅇ 규격(세로x가로) : 초상 167 x 99cm

     

     

     
                       

     

     

     

     

     

     

     

     

     

     

     

    초상화는 보지도 못하고

     

    문화재청자료

     

     이덕성(

    • 집필자
    1655(효종 6)∼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지비자(知非子).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 후생(德泉君厚生)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후영(後英)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호조참판 문수(文秀)의 딸이다.
    1677년(숙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2년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부정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의정부사록·의금부도사·성균관전적·공조좌랑·병조좌랑 등을 거쳐 1684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85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 때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다가 순안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병조정랑을 거쳐 다시 정언·지평이 되어 국정 전반에 걸친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병조정랑·사복시정을 거쳐 16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동래상인들의 잠매행위(潛賣行爲 : 밀매행위)와 왜인의 불법을 징치하는 데에 크게 힘썼다.
    기사환국 때에 일시 사직하여 향리에 돌아갔다가, 해주목사·병조참지·의주부윤·장례원판결사·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9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동부승지·예조참의가 되었다. 169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사서(史書)를 구입하다 금령에 걸려 파직되었다.
    다시 형조참의·무주부사·강원감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1704년 충청감사가 되었으나, 재직 중에 병으로 죽었다. 특히 글씨에 능하여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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