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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경조오부도-보물 제850-2호
    문화재/내가 본 보물 2015. 7. 16. 20:36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경조오부도

    -보물  제850-2호

     

     

      보물 제850-2호               보물 제850-2호    
     
     

    종목

    보물  제850-2호

    명칭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분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지리

    수량

    1조(21첩)

    지정일

    2002.12.07

    소재지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5, 서울역사박물관 (신문로2가,서울역사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공유,서울역사박물관

    설명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조선 철종 12년(1861)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전국 지도로 최고의 선본이다. 총 21첩으로 되어 있으며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되어 있어 모두를 아래 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제1첩에는 지도유설, 경도 및 각 도별 인·물수, 지도표, 경도오부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첩부터 제21첩까지가 전국지도이다.

    지도는 지방의 군현, 산, 강 등이 주요 부분을 이루는데, 여기에 각 군현간에 통하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도로에는 10리마다 구획이 지어져 있다. 세부적으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성신여대박물관 등에 동일본이 소장되어 있으나, 경도(京都) 및 각(各) 도별(道別) 인(人)·물수(物數)는 다른 기관 소장본에는 없는 내용으로 서지학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목판 인쇄상태와 채색 솜씨, 그리고 보존상태 등이 훌륭하다

     

     

     
                       

     

     

     

     

     

     

     

     

     

     

     

     

     김정호(

    • 집필자
    조선 후기의 실학자 겸 지리학자.
    생몰년 미상.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는 조선시대 가장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가장 많은 지리지를 편찬한 지리학자이다.
    일제시대부터 ‘김정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다. 그리고 연구가 깊어지면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란 3대 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제작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호는 평생 국토정보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 매진한 진정한 학자이자 출판인이다.

    [활동사항]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김정호의 업적을 시대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는 『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 3책(경기·강원·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대신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생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록을 모두 합해도 현재의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다. 이에 따라 김정호가 황해도 토산 출신이라든지, 도성 숭례문 밖의 만리재나 약현 부근에 살았다는 등의 일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의 작품 대다수가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렇게까지 기록이 없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발달한 조선에서 가계 기록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양반은 아니며 중인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들 중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기록한 유재건의『이향견문록』에 김정호의 전기가 실렸다는 점, 『지구전후도』,『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민의 장인 출신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뛰어난 수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지 않은 것은 그가 평민이었기 때문이며, 이는 전통시대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懷)함”이란 글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1834년(순조 34)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懷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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