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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돈등의동복화회입의 (尹暾等의同腹和會立議)-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문화재/내가 본 시도유형문화재 2015. 4. 5. 17:21
윤돈등의동복화회입의 (尹暾等의同腹和會立議)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종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명칭
윤돈등의동복화회입의 (尹暾等의同腹和會立議)
분류
기록유산 / 문서류/ 관부문서/ 증빙류
수량
1매
지정일
1989.03.18
소재지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안대로 398 (상대동, 대전역사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소유.관리
김영한 설명
조선시대 윤돈이라는 사람이 처가인 문화 유씨가문에서 토지와 노비 등 많은 재산을 분배받은 증서이다.
윤돈이 그 아들 윤창세에게 쓰게 하였고, 모두 3통을 작성하였으나 2통은 없어졌고, 1통만이 남아 있다. 윤돈은 파평 윤씨로 노성종파를 이룬 중시조로 전해져 온다.
증서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출가한 딸에게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당시의 조선시대 가족사 및 사회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주요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증참판부군필적
同腹-한 어머니의 배에서 남
和會-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서로 가지고 있던 나쁜 마음을 풂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여승(汝昇), 호는 죽창(竹窓). 윤시영(尹時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천군수(林川郡守) 윤징(尹澄)이다. 아버지는 윤극신(尹克新)이며, 어머니는 동몽교관 남견손(南堅孫)의 딸이다.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 두 시험에 모두 합격했으며, 158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정자·수찬·교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591년 이조정랑으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 세자 책봉 문제)로 유배된 정철(鄭澈)에 연루된 백유함(白惟咸)·유공신(柳拱辰) 등을 학관(學官)에 천거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추고를 받고 삭직되었다.
이듬 해 복관되었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였다. 1593년 명나라 장수 총병(總兵) 낙상지(駱尙志)·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이 나오자 부교리로서 접반관(接伴官)으로 활약했고, 이듬 해 사인을 거쳐 응교로 시강관이 되었다.
이어 직제학·동부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8년 병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어, 척신(戚臣)의 직을 파할 것과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형조참의·예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았다.
1600년 다시 도승지·예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이미 고인이 된 성혼(成渾)에 대해 왕을 호종하지 않았고 간신들과 한 당이었다고 탄핵해 추삭(追削: 죽은 뒤에 생전의 벼슬을 빼았음)하게 하였다.
1602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체직을 원해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이후 대사성·도승지·병조참판을 거쳐, 1604년 공조판서에 올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선조가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장마로 산릉이 무너지자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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